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모진 생명 태어날 때6
에세이 제1196호(2020.12.26)
이득수
승인
2020.12.25 18:52 | 최종 수정 2020.12.25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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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철이라고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도 아니고 월사금을 내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날은 이상할 정도로 머리에 닭을 이고 장에 오는 사람이 드물어 도무지 장사가 되지 않았다. 겨우 닭 세 마리를 사 점심 때쯤 부산장꾼에게 도매로 넘기고 우선 장국밥에 막걸리부터 한 잔 마시다 어쩌면 오늘 아내 명촌댁이 몸을 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면 우선 건어물 전에 들러 미역이라도 한 곽을 사고 미역국에 넣을 광어도 제법 큰 놈을 한 마리 사야할 것이었다. 그러나 수중의 돈을 세어보니 농사꾼이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절대로 먹지 않고 깊숙이 숨겨두는 씨 나락처럼 다음 장날 장사할 밑천 몇 푼을 제쳐두면 미역 한 곽 살 돈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거기에다 마침 보리양식도 달랑달랑하는 판이라 오늘 장사가 잘 되면 다문 반말이라도 팔아갈 요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도 여럿을 낳아봐서 알지만 비록 늘 양식이 간당거리는 살림이지만 제 태어나는 날 의식이 풍성한 놈이 있고 첫밥 끓일 양식이 떨어질 경우도 있어 나름대로 다 제 타고난 먹을 복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전쟁이듬해라 그런지 이번 놈의 먹을 복이 유독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기가 찬 기출씨는 우선 막걸리부터 한 잔 더 마셨다. 그리고는 고기 전으로 가서 써도 되는 돈을 세어보니 영 몇 푼 되지 않았다. 고심하던 그는 장터입구 난전에 파는 물이 가서 비늘이 다 떨어지고 눈이 흐릿한 갈치 한 무더기를 거저다 싶을 정도의 헐값으로 사서 새끼줄로 야무지게 묶었다. 아이를 오늘 꼭 낳는다는 보장도 없으니 우선은 다른 아이들이라도 먹을 생선을 산 것이었다. 하도 식구가 여럿이라 그까짓 물이 좀 날린 것이야 아무 문제가 안 되어 그저 다들 잘도 먹을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닭 전에 가서 장사를 좀 더 할까 머뭇거리는데
“아부지, 아부지!”
열여섯 살의 순찬이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와?”
“엄마가 알라 낳다. 아들이다!”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1남 4녀에 큰집의 귀찬이까지 합해 여섯이나 되는 딸들을 보고 맨날 ‘이 노무 가시나들. 이 노무 엔아들.’이 귀에 못이 박힐 판이라 둘째 아들이 태어난 것을 누구보다 아버지가 기뻐할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 가자!”
기분이 좋아진 기출씨가 마른 미역을 순찬이에게 넘겨주더니
“아나. 순찬아, 강냉이박상이라도 좀 사 가자.”
빨간 지폐 한 장을 건네주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사실 기출이가 아들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얼마 전 죽은 도분이까지 죽은 아이 둘을 포함해 딸 여섯에 겨우 아들 하나를 낳다보니 삼신할머니가 정해주는 일을 자기가 어쩔 수는 없지만 참으로 야속하다는 생각을 줄곧 해오던 참이었다. 다행히 외아들인 일찬이가 머리가 좋아 3학년이 된 지금까지 단 한번도 1등을 놓치지 않아 이건 뭐 개천에 용이 난 것이 아니라 남천내갱빈에 용이 났다는 소리를 수없이 듣기도 해서 외아들이지만 남의 열 아들이 부럽지 않기도 했다.
다행히 그 일찬이는 얼굴도 희고 이목구비도 반듯하며 손끝도 야무져 나중에 학교선생이나 면장쯤은 충분히 하고도 남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아들이 있고 자신의 나이가 이미 쉰에 가까운 마흔아홉이나 되어도 그가 은근히 아들을 바라는 이유가 달리 있었다. 나중에 공부 잘 하는 장남 일찬이가 출세해서 되어 집을 떠나면 작은아들이 있어 농사를 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비록 넉넉한 농토는 아니더라도 논배미 하나하나가 모두 죽기 살기로 고생해서 마련한 목숨 줄과 같아 살아생전 절대로 팔수도 없지만 죽어서라도 남의 손에 넘어간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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