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모진 생명 태어날 때5

에세이 제1195호(2020.12.25)

이득수 승인 2020.12.24 23:41 | 최종 수정 2021.05.01 21:39 의견 0
요즘의 언양5일장터(20. 10. 22)
요즘의 언양5일장터

     

그렇게 포원과 설움으로 얼룩진 봄이 지나고 바야흐로 감꽃이 피고 보리를 베고 감자를 캐고 모내기를 하는 초여름이 왔다. 온 마을의 아낙들이 모를 심다 새참을 먹는 논두렁의 진흙탕 속에 핀 연분홍빛 모미싹(메꽃)의 새뜻한 꽃송이처럼 신통한 소문이 하나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지난겨울 신불산너머로 빨갱이에게 짐꾼으로 잡혀가 그 깊은 금강골의 눈밭을 헤치고 혼자 살아온 명촌가손 기출씨도 대단하지만 기출씨가 빨갱이가족으로 몰려 몇 달이나 도망 다닌 동안 그렇게 모질게 순경들에게 매를 맞으면서도 끝끝내 남편의 행방을 대지 않아 이빨이 흔들리고 어깨가 내려앉고 허리를 못 쓰는 데다 온몸에 이열이 든 명촌댁이 그 와중에 갓 배태한 아이를 배가 남산만큼 부르도록 아무 탈 없이 길러 곧 해산을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많이 맞고도 아이를 놓치지 않는 것을 보면 명촌댁이 참 대단한 강골이라는 이야기는 이내 생명이란 참으로 끈질긴 것이라 제가 살아날 운명이라면 어떤 난관이 있어도 기어이 태어난다는 이야기로 발전했다. 

이어 이야기는 똥줄이 범 줄보다 무섭다는 노름꾼의 문자로 번져 그 명촌댁의 뱃속에 든 아이가 그 범 줄보다도 더 무서운 아이다, 굉장히 깐지고 야무진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발전하더니 비단 그 아이뿐 아니라 눈밭에서 살아온 명촌가손 기출씨를 비롯한 집안 전체가 늘 사람이 좋고 순해 단 한 번도 남에게 해코지를 한 일이 없는 죽은 서촌댁의 뒷배라고, 모두가 조상을 잘 모신 효자 명촌가손 덕분이라고도 했다.

장날이 되자 기출(우리 아버지)씨는 한창 모내기철이지만 농사일을 접고 장으로 나왔다. 성냥, 비누, 호롱불기름 석유도 사야 되지만 무엇보다 아내 명촌댁의 오늘내일이면 또 아이를 낳을 것 같아서였다.

같은 마을의 소 이까리장사 이조 이상은 밧줄을 가득 지고 당시기장사 황영감은 예쁘게 물들인 댓가지로 짠 반지고리와 함지를 지고 갈퀴장사 출강김손은 대나무갈퀴와 대소쿠리를 잔뜩 지고 남천내 뚝다리를 건너고 아무 장사도 않는 사람들은 쌀이나 닭, 하다못해 열무 같은 채소라도 이고 나섰지만 기출이씨 달랑 맨손이었다. 

명촌댁
언양 5일장에서 채소씨앗과 고춧가루를 팔았던 우리어머니 명촌댁.

그런 기출씨를 보고 마을사람들은 그 참 재주도 좋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하루장사이 5일간을 대나무 반지고리나 갈퀴를 만들고 부지런히 열무를 기르고 다듬어 장거리를 만들어야 푼돈이라도 만들어 성냥과 비누와 석유를 사오지만 기출씨는 달랑 맨손으로 나가 닭 몇 마리를 사고팔아 그런 가용품은 물론 거나하게 술까지 마시고 비록 물은 좀 갔지만 파장의 생선까지 한 아름 사들고 오기 때문이었다. 

“야, 이 사람들아! 농군들이 이 바쁜 모숭기철에 농사는 안 짓고 장에는 다 무신 일이고?”

하얀 두루마기까지 잘 차려입은 마을 최 연장(年長)일촌노인이 징검다리를 건너느라 숨이 차서 지팡이를 짚은 채 한참이나 헐떡거리며 장에 가는 사람들을 차례로 훑어보고 있었다.
“아재, 장에 가능교?”
“오냐.”

엉겁결에 인사를 하고 황급히 장터거리로 향하는 집안조카를 보고 일촌어른이 끌끌 혀를 찼다.

“남이 장에 가니 자기는 거름 지고 장에 간다카디마는 일도 없이 장에는 말라꼬 날마다 가는 기고? 쯧쯧쯧.”

못마땅한 듯 지팡이에 담뱃대를 탕 두드렸다. 그러나 이내 자신도 그들과 진배없다는 것을 깨닫고 싱긋 웃으며 다리를 건넜다. 그저 아무 낙도 없이 꿍꿍 일만 하는 사람들이 닷새 만에 장에 나가 세상구경을 하고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고 들어오는 것이 유일한 낙임을, 그렇게 하루장 따나(간(間) 닷새가 지나가는 것을. 서커스나 원숭이를 끌고 오는 약장수 같은 제법 신통한 구경거리가 아닌 뭐 새로운 물건이 나온다든지 하다 못 해 멱살을 쥐고 싸우는 사람만 생겨도 그렇게 재미날 수가 없다는 것을.

平里 이득수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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