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 소장으로 김득신(金得臣·1754~1824)의 『긍재풍속화첩』 중 <야묘도추〉란 풍속화가 알려져 있다. 병아리를 잡아 물고 도망가는 들고양이와 이에 놀란 닭, 이를 긴 담뱃대로 제지하려는 남성 등의 모습이 잘 포착된 작품이다. 들고양이의 등장으로 인하여 조용한 여염의 집에 혼란이 펼쳐지는 장면으로 <파적도>라 불리기도 한다.
이 김득신과 동명이인으로 조선 중기의 시인인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1604~1684)이 있다. 이번 글에서 소개하려는 김득신이 바로 조선 중기 시인인 그 사람이다. 김득신은 천재 시인이라기보다는 후천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해 벼슬길에 오르고 훌륭한 시를 남긴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알다시피 백곡 김득신은 사마천이 쓴 『사기』 열전의 첫머리에 실린 「백이열전」을 1억 1만 3000번 읽었다는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자기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 이름 하였다. 이때 1억은 10만을 가리킨다. 그가 실제로 읽은 횟수는 11만 3000번이었던 셈이다. 그가 가장 아낀 글이 「백이열전」이었다.
김득신은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지각이 발달하지 못해 노둔하였다. 천연두 후유증으로 책 한 권을 석 달이나 읽고도 첫 구절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아둔하였다. 대개의 선비들이 5살 때부터 공부를 시작하였지만, 김득신은 머리가 따르지 않아 10살 때 처음 부친에게 『사략(史略)』을 배웠으나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
그의 조부는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을 이끈 김시민이고, 아버지는 경상도 관찰사(지금의 도지사)를 지낸 김치(金 緻·1577~1625)이다. 즉 김득신은 명문가에서 태어난 바보 아이였다. 김득신의 아버지 김치는 이러한 아들을 질책하기보다 격려하고 감싸주었다. 김득신에게 “학문의 성취가 늦는다고 성공하지 말란 법이 없다. 그저 읽고 또 읽으면 반드시 대문장가가 될 수 있다”라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는 34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고문 읽기를 시작하였다. 김득신은 남들보다 많이 읽고 또 읽어 39세 때인 1642년에 진사시에 낮은 성적으로 겨우 합격하였다. 그러고는 더 부지런히 책을 읽어 다시 20년 뒤인 1662년에 59세의 나이로 증광시 병과 19위로 급제했다. 그의 눈물나는 고투가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가 쓴 글 중에 34세부터 67세까지 읽은 고문의 횟수와 목록을 기록한 「독수기(讀數記)」가 있다. 이 글에 자신이 읽은 책 중 특별히 반복해서 1만 번 이상 읽은 36편의 문장을 나열하고 각 편을 읽은 횟수와 읽은 이유를 밝히고 있다.
「독수기」의 마지막 부분만 보겠다.
“… 갑술년(1634년)부터 경술년(1670년) 사이에 『장자』와 『사기』, 『대학』과 『중용』은 많이 읽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읽은 횟수가 일만 번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독수기」에는 싣지 않았다. 만약 뒤의 자손이 내 「독수기」를 보게 되면 내가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경술년 초여름에 백곡(柏谷) 노인이 괴산 취묵당(醉黙堂)에서 쓴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책을 읽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득신은 스스로 시에서 『사기』를 천 번 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당시에 책을 읽은 횟수는 어떤 방식으로 기록했을까? 조선시대에는 책 읽은 횟수를 세는 도구인 ‘서산(書算)을 활용했다. 아래쪽에 열 개의 홈을 파고 위쪽에 다섯 개의 홈을 파서 한 차례 읽을 때마다 아래쪽 홈 하나씩을 위로 젖힌다. 열 개의 홈을 다 젖히고 나면 위쪽 홈을 하나 젖혀 열 번의 숫자를 표시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매번 책을 읽을 때마다 목표를 정해 읽은 횟수를 별도의 종이에 기록해 나가면서 읽었다. 읽는 방법도 지금과 달리 소리를 내며 읽는 성독(聲獨)의 방식이었다.
그러면 그는 왜 「백이열전」이라는 글 한 편을 1억 1만 3000번 읽었을까? 물론 그 글을 가장 좋아한 이유도 있겠지만, 자신의 어둔함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었으리라. 그리하여 자신이 특히 좋아하는 글을 선택하여 시도를 하였던 셈이다.
김득신의 저술은 병자호란(1636년 12월∼1637년 1월) 때 많이 타 없어졌다. 그렇지만 문집인 『백곡집』에는 많은 글들이 전하고 있다. 그 중 시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문보다는 시에 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언절구와 칠언절구를 잘 지었는데, 「용호(龍湖)」·「구정(龜亭)」·「전가(田家)」 등의 시가 유명하다. 어촌이나 산촌과 농가의 정경을 그림같이 묘사하여 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한문 4대가로 불리는 이식(李植)으로부터 “그대의 시가 당금 제일이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조선 17대 왕 효종으로부터도 당대 최고의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은 다독가이자, 최고의 문장가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김득신의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無以才不猶 人自畫也·무이재불유 인자획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이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莫魯於我 終亦有成·막로어아 종역유성)/ 모든 것은 힘쓰는데 달렸을 따름이다.(在勉强而已·재면강이이)’,
마침 ‘독서왕 김득신문학관’(충북 증평군 증평읍 인삼로 93)에서 다음 달인 7월 11일까지 ‘느리지만 끝내 이루었던 길, 독서왕 김득신 전’을 열고 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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