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72)- 운강 조원이 소실인 여류시인 이옥봉을 쫓아낸 이유

옥봉이 이웃 여자의 부탁으로 남편 대신 글 써 줌
여자가 나랏일에 간여했다고 남편이 화 내 쫓아냄
평생 남편 만나지 못해 병 들고 임진왜란 때 죽음

조해훈1 승인 2021.06.20 14:26 | 최종 수정 2021.06.21 20:25 의견 0

평생 이별로 인한 한이 몸의 병 만들어(平生離恨成身病·평생이한성신병)
술로 달래지 못하고 약으로도 치료 못하네.(酒不能療藥不治·주불능료약불치)
얼음 밑 흐르는 물처럼 이불 속에서 눈물 흘리니(衾裏泣如氷下水·금리읍여빙하수)
밤낮을 울어도 사람들은 알 수 없으리.(日夜長流人不知·일야장류인부지)

위 시는 16세기 허난설헌과 같은 시대의 여류시인인 이옥봉(李玉峯·생몰년 미상)의 시 「규방 여인의 마음(閨情·규정)」이다. 그녀의 본관은 전주이다. 호가 옥봉이고 본명은 숙원(淑媛)이다.

남편인 운강(雲江) 조원(趙瑗·1544~1595)과의 이별로 한이 깊어 몸에 깊은 병이 되었다. 이별로 인한 병은 술이나 약으로는 다스리지 못한다. 그 병은 오직 남편만이 고칠 수 있는데, 남편을 만날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건 밤낮으로 이불 속에서 우는 것밖에 없다. 이별의 슬픔이 얼마나 컸으면 한으로 이어져 병을 얻은 안타까움을 잘 그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옥봉의 시 '몽환' 육필원고이다. 출처=천지일보
이옥봉의 시 '몽환' 육필원고이다. 출처=천지일보

시가 슬프고 애절하다. 그러면 이옥봉은 왜 이런 슬픔의 한이 서린 시를 지었을까? 그 근원을 한 번 찾아가보자. 먼저 그녀의 시 한 수를 더 보자. 시제는 「남을 위해 억울함을 하소연하며(爲人訟寃·위인송원)이다.


대야를 거울삼아 세수를 하고(洗面盆爲鏡·세면분위경)
맹물을 머릿기름삼아 빗질합니다.(梳頭水作油·소두수작유)
저는 직녀가 아닌데(妾身非織女·첩신비직녀)
제 남편이 어찌 견우이겠습니까?(郞豈是牽牛·랑기시견우)

위 시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이웃 여자가 옥봉에게 소도둑으로 잡혀간 남편을 위해 운강에게 글 써 줄 것을 부탁하자 옥봉이 감히 남편에게 써 달라고는 못하고 그 사정을 불쌍히 여겨 자신이 직접 써 준 시이다. 시는 ‘저는 평범한 여자일 뿐 직녀가 아닙니다. 그러니 제 남편이 견우일 리가 없습니다.’라고 표현함으로써, ‘남편은 소를 훔치지 않았다’는 말을 에둘러 강조한 것이다.

조원의 문집인 '가림세고'에 부록으로 붙은 이옥봉의 시편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원의 문집인 '가림세고'에 부록으로 붙은 이옥봉의 시편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형조의 당상관들이 이 시를 보고 크게 놀라며 “이 글을 누가 써 준 것이냐?”고 묻자 그 여인이 사실 그대로 말하였다. 이에 당상관들은 그 남편을 풀어주고 그 시를 소매에 넣고 운강을 방문하여 “공의 기이한 재주를 늦게 안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며 돌아갔다.

손님이 돌아가자 운강은 옥봉을 불러 그녀의 행실을 크게 꾸짖고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운강은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지금과는 다른 시대적 상황 탓이다.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여자가 시를 짓는 것도 죄가 되었다. 비록 여자가 글을 알아도 내세우면 안 되었다. 그런데 옥봉이 글을 좀 안다고 더 나아가 나랏일인 판결에 영향을 미치도록 간여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잣대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옥봉이 울며 사죄했으나 운강은 끝내 듣지 않고 그녀를 쫓아냈던 것이다. 1572년(선조 5)에 대과에 급제해 이조좌랑과 삼척부사, 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운강은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 병조판서 신암(新菴) 이준민(李俊民· 1524~1590)의 사위였다. 이 일로 옥봉은 운강과 헤어졌으며 다시는 운강을 만나지 못하고 임진왜란 때 죽었다고 한다.

그러면 옥봉은 어찌하여 서녀로 태어났던 것일까? 옥봉은 양녕대군의 고손자인 자운(子雲) 이봉(李逢·1526~?)과 그의 본부인이 아닌 여성 사이에 출생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옥봉은 정실로 들어갈 수 없어 운강의 소실이 되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글과 시를 배웠다.

조원의 묘가 있는 경기도 파주 임천 조씨 묘역에 있는 이옥봉의 묘비.
조원의 묘가 있는 경기도 파주 임천 조씨 묘역에 있는 이옥봉의 묘비.

옥봉은 중국 명나라에까지 시명이 알려진 여류시인이었다. 중국과 조선에서 펴낸 시선집에는 허난설헌의 시와 나란히 실려 있다.

조원의 고손자인 조정만(趙正萬)이 남긴 「이옥봉행적」에 그녀에 대한 행적이 일부 남아 있으며, 『명시종(明詩綜)』·『열조시집(列朝詩集)』·『명원시귀(名媛詩歸)』등에 옥봉의 작품이 전하고 있다. 옥봉의 시집 한 권이 있었다고 하지만, 시 32편이 수록된 『옥봉집(玉峰集)』 1권만 운강의 문집인 『가림세고(嘉林世稿)』의 부록으로 전한다.

옥봉의 대표 작품으로는 「영월도중(寧越途中)」·「만흥중랑(謾興贈郞)」·「추사(秋思)」, 「자적(自適)」, 「증운강(贈雲江)」, 「규정(閨情)」 등이 있다.

옥봉의 후손은 없으며, 그녀의 묘는 남편인 운강의 묘가 있는 임천 조씨 묘역인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75-15에 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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