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시인인 성재(省齋) 고시언(高時彦·1671~1734)은 본관이 개성(開城)으로 양반이 아니었다. 피지배계층인 중인이나 천민 집안에서 출생한 것으로 짐작된다.
집이 너무 가난하여 살아갈 수가 없어 어릴 때부터 역관(譯官)이 되고자 하였다. 중인이나 천민이라도 역관시험에 합격하면 벼슬을 할 수 있고, 밥을 굶지 않아도 되었다. 10세를 전후로 혼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함께 고향을 떠나 한양으로 올라왔지만 농토도 없어 먹고살 방법이 없었다. 오로지 역관시험에 합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는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며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하였다. 연로하신 부모님과 굶어죽을 판이었다.
그렇게 비장한 각오로 공부한 결과 불과 17세의 나이에 통역관 시험에 합격했다. 1687년(숙종 13) 역과(譯科)에 급제하여 역관이 된 것이다. 역관의 녹봉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이제 끼니를 거르지 않고 부모를 봉양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다. 다음은 그의 시 「추효(秋曉)」를 한 번 보자.
산에 내리는 비가 빈 뜨락에 들이치니 山雨入空庭(산우입공정)
차가운 빗소리에 오경이 지나가네. 寒聲五夜竟(한성오야경)
새벽이 오는 것을 재촉하니 옷을 골라 曉來催攬衣(효래최람의)
시들어가는 국화에게 물어보려고 하네. 欲問黃花病(욕문황화병)
시를 보면 그가 출근하려고 이른 아침에 옷을 고르고서는 맞을까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다. 역관이 출근하는 곳은 사역원(司譯院)이었다. 사역원은 고려·조선시대의 번역·통역 및 외국어 교육기관이다. 『경국대전』에는 한학(중국어) 생도 35명, 몽학(몽골어) 생도 10명, 왜학(일본어) 생도 15명, 청학(여진어) 생도 20명으로 총 80명으로 규정되었다.
당시 역관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중국 사행에 참여한 역관들이 중국에서 물품을 구매해 와 상인들에게 넘기면 이들 물품은 왜학 역관(倭學譯官)을 매개로 일본에 수출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역관들은 막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 사이에는 무역으로 큰돈을 모은 역관들이 많았다. 이러한 역관 가운데 어떤 이들은 자신의 경제적 능력을 적극적으로 과시하기도 하였다.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허생전(許生傳)』에 나오는 서울 최고 부자 변 씨의 실제 모델로 잘 알려진 변승업 (卞承業·1623~1709)이 그런 경우이다.
하지만 고시언은 장사를 해 돈을 축적하는 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공부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사서오경을 비롯하여 제자백가를 두루 읽었다. 사역원 후배들이 “고시언이 경전과 백가(百家)에 아주 뛰어나다”라며. 그를 스승처럼 모셨다. 그가 공부를 계속 하지 않았더라면 몰래 장사를 해 돈을 모으는 그냥 평범한 역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끊임없이 공부를 한 덕에 외교관으로서의 실력을 발휘하여, 청나라에 8차례나 다녀오고 2품의 관계에 올랐다.
고시언은 천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대통력(大統曆)이 정밀하지 않아 어려움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청나라에서 역법에 관한 책을 수십 권 가지고 돌아오자 관상감은 책자를 보고 감격했다. 관상감에서 영조에게 고시언의 공을 아뢰자, 임금은 그에게 종2품으로 품계를 올려준 것이다.
한편 그는 자신처럼 천민 중에서 문장가가 더러 있는데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다 천민과 중인들의 시집을 만들기로 했다. 주위에서는 “이미 시를 골라 만든 문집인 『동문선(東文選)』이 있는데 굳이 그런 시집을 낼 필요가 있겠소?”라며 만류했다. 그러자 고시언은 ”『동문선』은 사대부들의 작품이다. 신분으로 시의 우월을 논할 수는 없다“라며, 『소대풍요(昭代風謠)』 제목으로 문집 간행을 추진했다. 한때의 문장가로 알려졌으나 신분이 낮다고 해서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쉬웠다. 그로서는 『동문선』과 『소대풍요』가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고시언은 채평윤과 함께 역시 중인 시인인 홍세태가 편찬한 『해동유주(海東遺珠)』를 토대로 를 뽑고, 거기에 실리지 않은 시인들을 추가했다. 『소대풍요』에 시가 실린 시인은 162명이고, 작품은 685수였다. 중인과 상인들, 천민들의 시 등이 실렸다. 그리하여 문집은 9권 2책 목판본으로, 1737년(영조 13)에 간행되었다.
하지만 고시언은 『소대풍요』의 발간을 보지 못하고, 1734년 대중국관계에서 임시로 파견되는 비정규 사절인 진주사(陳奏使)를 따라 다시 중국에 가다 연경의 객관에서 죽고 말았다.
그가 죽자 오광운이 적극적으로 간행에 참여해 책은 햇빛을 보게 됐다. 이 책이 나오자 중인과 천민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동안 시를 짓는 것이 사대부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었으나, 『소대풍요』가 나오면서 중인들과 천민들도 활발하게 시작(詩作) 활동을 했다. 고시언은 『소대풍요』 외에 『주차소의(註箚疏疑)』·『성재집(省齋集)』 등을 저술하였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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