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어떤 시묘살이
김 영 화

베트남 직장에서 돌아온 주검
게우고 게워도 퍼렇게 살아나는
애간장이 짓무른다
밤이슬 흠씬 젖어도
잦아지지 않고 들끓는
이미 떨군 시간
두 해를 넘는다
오래 먼 객지 생활에도
손 갈 데 없이 자랑이었던
혼자 멎은 심장
복기하고 복기해도
더 저며와
어릴 적 떠먹이던 밥숟가락 마냥
매일 차려내는 밥상
그래
아무래도
자식은 그저 먹이고 볼 일
산중 아들 끼니에
아들 또래 공원묘원 직원에게
때로 냄비 채 도시락 안기는데
여북하여 손사래도 못 치는
남은 부모살이

합천 갈대

붉은 실핏줄 모래밭 기어이 삼킬 태세다
이제 막 불거지거나 살 올라 탱탱 부푼 물관
웃비 보태 너른 황강에 닿을세라
팔다리 내뻗어 게걸음이다
젖은 발로 달려와 마주친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비밀
쉴 새 없이 꿈틀대고 속삭여 어찌
여린 발로 강바닥 움켜잡는지
어른 키 훌쩍 빽빽한 퍼런 무리가
시치미로 에워싸는지
바람은 또 몇 알을 보태 질겨졌는지
누치, 돌고기, 참몰개, 얼룩동사리, 밀어, 낙동 납자루
이름도 낯선 민물고기 품는다는
신문 기사 떠올랐는데
오랜 친구 황강
어깻죽지인 양 기꺼이 내어주고
더풀더풀 춤사위도 함께다
물길도 사람 속처럼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어서
복장 터지게 굽은 시간이 바잡기도
때론 꿀렁꿀렁 엔굽이친다
여린 출발이
새끼줄 꼬듯 꼬여도 흠칫
마음만은 살가운
삶의 쌍둥이 지도
이 강가
나는
몰래 그려 훔친다


기차만 보면

헤어지려 딱 결심했는데
기차만 보이는 거라
라디오에선 철도파업 뉴스가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는
하필 왜 흘러나오는지
심지어 달 목욕 동생이
기차여행하고 싶다
고 실없이 들이댈 때 하
눈물이 앞을 가리더라
나는 천생 철도기관사 마누라로 살 건가 봐
라는 친구 넋두리가
별안간 처연하게 돌연 들어와
재빠르게 달아나는데
내 연인이 기관사라면
나는 애써 넘는 노을 더불어
갈까마귀 산봉우리 가를 때
일렬직관은 따놓은 당상이라
꼬리 한 백 량쯤 알록달록 달고
내친김에 가장 오래 깊어도 물속 훤히 보인다는
그 바이칼호수를 떠올려보는 것인데
너나 나나 이젠 제법
궤도이탈쯤 꿔 볼 나이
연민은
낡은 추억일 뿐

은행

만삭 며느리 같은
눈치 없고
해거리도 없는
다디단 찬바람 마시고
애타게 닮고 싶어
누런 낯빛으로
기울고 차는

지실 미륵불

언제부터였는가
무릎까지 잠긴 여인
금방이라도 저린 다리 펴
굳은 땅 걷어 젖히고 나오겠다
부드럽게 흐르는 옷자락
둥근 어깨
오른 가슴에 올린 뭉그러진 손
선뜻 내밀어 줄 듯한 왼 뭉툭 손이
따듯하다 돌이 아닌 듯 아니 잊은 듯
마을 돌아 외진 논 언덕
잡목에 둘러싸여
더는 찾지 않는 미륵불
첩첩산중 기댈 데 없는
절절한 마음터 모여 앉혔던 걸까
전쟁기에 베어졌는지 잃었는지
모질게 잘려 흔적만 남은 목
분명 넉넉 온화한 모습이었을 얼굴은
땅속 깊이 묻혔는지 아예 부서져 흩어졌는지
얕고 짧은 상상력으로 적이 짐작만 할 뿐
대신
발치 깨 또렷이 뚫린 성혈 바윗돌 하나
절절한 상징처럼 둥글게 누워있다
누군가 그 손 빌어 이어왔을 일가
떠나고 떠밀려 이제
청년도 아이 울음소리는 더 귀한
쓸쓸한 쓸모가 애처롭고
잊히고 근근이 버텨 갈
근간이 안타까워
저 멀리 오도산
내려보는 눈길 아득하다

포도

큰아이 오면 주려던
포도 한동안 잊고 지냈다
맛있다며 마음 써 준 후배
쟁여 뒀는데 아뿔싸 급히 뒤적이니
웬걸 동그랗게 치뜨고 보는 송이들
사람 명줄 마냥
과일 보존도 능란해서인가
씨마저 발라낸 재배기술
식물본능도 흔들려 속는다

웃자라는 아이
늦자라는 아이
기다리지 못해
촉진 주사 한 방이면 끝나는

지베렐린
이름도 예쁜 식물호르몬
포도나무 맹한 그것은
아무것도 모른 채
오늘도 알알 송이
헛배 부푼다

어떤 서예가

점포정리
반값세일
동광사 유리벽에
나붙은 붓글씨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교육단지 육교 건너 바로 밑
낡은 간판 말쑥이 파스텔색 페인트로
단장한 지 오래지 않았는데
덜컥 고장 난 시계

아이들이 한바탕 빠져나간 오후쯤이면
화선지 더미가 먼저 맞고
내부 수리로 갈아입어도 한갓진 주인은
서둘러 먹물에 붓을 적시는데
가끔 보이던
아들 같은 청년 어깨 앞뒤를 잰다
문구점도 책방도 전자 장터로 숨은 지 오래
먹글씨 두 문장만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네 쪽 사진관

소녀 소년 연인 친구
엄마 딸 아들 아빠도 오시라
오렌지 보라 곱슬머리 부푼 가발 쓰고
짧디짧은 네 순간
어차피 미덕은 압축인 걸
늘어지는 건 매력 없지
참을 수 없지
어제 연인은 지우고
오늘 연인은 레드카펫 주인공
골라 담아 장바구니처럼
삶의 이면쯤 누구나가 끌고 가는 그림자
눈 한번 질금 감았다 뜨면
부끄러움 따윈 금방 잊히지
자주 샛노랗던 유년
길고 지루한 해가 덕석에서 말라가던
나락 같았던 사춘기
마냥 푸른 줄 알았던 짧았던 청년은
자주 낯선 얼굴로 덤볐고
어느새 한 서너 개 이름으로 불려도
그저 그만인 여자 하나
주뼛주뼛 버튼 누른다

도움닫기

헛구역질이 토막 나는 오후
내달리다 엎어졌던
빈 운동장
보지도 않은 입시에 떨어지고
교문이 닫혀버린 꿈 연거푸 꾼 날
가쁘게 계단 기어오르면
치밀어 오르던 욕지기
항문을 옴팡 오므리고
발뒤꿈치 접는 시간
내일을 걷잡고 튀어 오를 수 있다면
납작 엎드린 오늘은
기꺼이 받아먹겠다던
나는
이제 긴 달림길도 마다하지 않는
마라토너

경운기와 자전거

잠긴 대문 열면
맨 먼저 맞아 주는
경운기와 녹슨 자전거
경운기는 떠나신 아버지
자전거는 봄 뒤따라가신 엄마
빈집 빈 마당
손잡이부터 녹슬고 있다
수박 참외 농사에
비닐하우스 모포 실어
덮고 걷고 또 덮고도 돌아보시던
가장자리 상추 시금치 뜯어
늦저녁 가쁘게 차려내시던 마루
한낮 고요 오랜 기다림처럼 집안 가득한데
두 분 쓰다듬던 고양이만
식구 늘여 꼬리 비빈다

김영화 시인

김영화 | 시인. 의령 출신. 마산에 거주하고 있으며 일터는 의령 신반. 6인 공동시집 『양파집』과 계간 『여기』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학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꼬뚜레 이사』를 냈다. san5f@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