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4호-신작시】 아라비안나이트 외 9편 - 차수민

장소시학 승인 2024.08.14 15:08 의견 0

아라비안나이트

차 수 민

춤만 췄다면 믿는 사람 있을까
수학여행비 보태고자 친지들 모셔
고구마잎 짙은 단발머리
좁은 마루 빙글빙글 돌 때
첨 춤추는 나를 보았다
입술 화장 짙은 긴 생머리
첫 일자리 서울에서 일산으로
다시 마산 흘러 촐랑촐랑 물결머리
일 마친 금요일은
맥주집 모였다가
수금 저조 회원 탈퇴는
더 시끌벅적한 술집에 벗어 놓고
청춘 흔들러 가던
택시 내리면 바다 먼저 다가와
안내하던 어시장 밤길
아라비안나이트
춤출 땐 시간도 돈도 아깝지 않았는데
춤만 췄다면 믿는 사람 있을까

지금은 어느 대학 교육관이 된
육호광장 돌아 창동 길목
호텔 로얄나이트도
머리 팔다리를 휘젓던 자리
철들지 않아도 나이 들어
미정이는 백 번째 선본 일본 남자를 따라갔고
진운이는 뇌종양 수술로 이젠 마구 흔들면 안 되고
석희는 계절처럼 온다더니 연락이 끊겼고
난 혼자는 갈 자신 없고
어시장 꽉 낀 청바지 반들반들
팔딱이는 물 좋은 생선을 보며
쿵쿵 울린다 아라비안나이트.

첫 시집

꿈은 꾸었어도
이뤄질지 몰랐다

내 시집
첫 시는 진찬이
개띠 언니 쥐띠 언니 다음
눈 빨간 토끼띠 언니
시집을 맨 처음
받은 사람도 진찬이
광려천 물풀이 엎드려 울었다

너무 익은 것도
설익은 것도 있지만
천천히 내길 잘했다
다시 보니 내 시들은
사람 아니면 장소더라

시집 받은 그들이 고른
그냥 읽어 맘 간다는 시는

늑대일까 별에 바치다 4월 올챙이의 꿈
보리 수매는 거시기하나 재밌다 했고
남편은 자기가 나오는 낚시라는 시만 좋다며
다른 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하고
딸들은 눈치 보며 겉핥기했다

대부분은
꼭 시가 너 같더라
어떤 말은
버티는 하루 힘든데
달콤한 사랑 시 없고
들여다보면 아픈 속
비뚤비뚤 골목길 시집이라
읽기 힘들다 했지만

첫 시집은
너머 계신 아버지께 올리는
새 구두 태나는 양복 보루 담배 탁주 주전자

내 첫 시집은
세상 불 데인 살가죽 하고 사는
집 앞 광려천 산책 쉬이 못 나오는
진찬이 손에 쥐여주는 꼬깃 손편지

지금은 땅 엎드린 풀잎들이지만
한때 비 내리고 천둥을 일으키는 하늘이었다

『꽃삼촌』은
별거 없지만
뭐가 많이 없는 내겐
꽃삼촌이 빽
뭐라 해도 달라졌다
내 시에 대해 가쿵 나쿵해도
그냥 넘길 수 있는 배짱에
혹시 시 닮을까
미루었던 다른 시인들 시집도 이제 맛보고
삼켜 넘길 수 있는 밥알이 많아졌다.

8월

북면 감계 작은 길옆에도
그늘 없이 내리쬐는 햇살
텃밭 가지 잎 뒤 대롱이고
까까머리 오리나무 열매
저수지를 보고 있다
가득 물 저절로 빠졌는지
안쪽 나지막 웅덩이 물오리 떼 놀고
왜가리 한 마리
며칠 빗지 않은 머리결
군데군데 쭈볏쭈볏
물속 딛고 건너길 넘어다보다
살짝 날아 다리 굽혀
무언가 땅에 내려놓는다
하얀 물감 쏟아졌는지
구름문 물밥 두어 덩이
까까머리 쑥 고개 내밀고
부리는 흙을 헤집는다.

이름이 한 줄 시

경옥아 보고 싶다

시외버스 오른쪽 옆면 광고 글
많은 경옥이 얼마나 설렜을까

경옥이 동네는 시끌시끌했겠지
그녈 아는 친구 건너 건너 건너

한 문장 시를 쓴 사람
쑥 바구니 끼고 놀던 친구일까
자전거에 경옥이 단발머리 닿던 오빠일까
마산 시외버스하차장
막 쪄낸 완두콩 알 빼 먹듯
고향 친구 이름 굴러 본다.

덕자와 점식

동갑내기 부부
아버지 지어 준 이름이라 그냥 좋았던 자야는
이름과 안 어울린다는 말 무심했다가
큰딸 학교 들어가는 해
이름 바꾸고

외아들 이름 쉽게 내놓을 리 없는 시어머니께
점식은 명 짧은 이름이라 하니
바꾼 첫날 바꾼 이름 부르셔서
얼떨결 수민 재민
민자 돌림 부부가 되어
제발 남들 장에 갈 때 니도 장에 가라던
어머니 말씀 새겼지만

지난 기억만 간간이 붙들고 사는 어머니
덕자는 막내딸 하나뿐인 이름
그 속 속 속
대학 시절 석남사 계곡에서 삼겹살 구워 먹던 맛

도서관 앞서 넘어져 코피 났던 오후 하늘
겨우 입은 청바지 가랑이 찢어져 숨을 곳 찾던
서로의 눈빛 재워 둔 순옥이도
덕자 아니면 안 된단다.

술 익는 차

마누라와 갈라섰다는 종식이
동네 밥집에 앉아
입맛 없을 때 좋다며 술술 순두부찌개
뜨건 한입 국물 얼큰 목 타면
내 아직 살아 있구나 넘어간다는
용쓰지 않아도 풀리는 순두부
먹지 않고 숟가락만 보고 있다
어떨 땐 밥보다 술이 먼저지
옆 편의점에서
술 잘 못하는 친구
눈 밑 꽉 차 있을 씁쓸함
한 병이면 남고도 남겠지만
북면막걸리 두 병

밥 뜨는 일 힘들었는지
쉬고 싶다는 그를 서둘러 보낸
막걸리 한 병
한여름 한밤을

남겨진 뒷자리에서
품은 만큼 뒤척뒤척
부푼 슬픔 던졌는지
닫은 채 살았던 눈을 떴는지
운전석 밑바닥 머리를 박고
반이나 무게가 줄어

차 문 열면
술도가
고향 외숙이집 하얗게 깔렸던 고두밥 내
집 가는 주전자 입 대다
얼굴 확 쏟아 썼던 막걸리
출근하며 퇴근하며
술 익는 차에서 홀짝홀짝 마신다.

막춤 마누라

며칠 전부터 마누라는 금요일 갈 데가 있다며
시간 빼놓으라 한다
알겠다 했지만
기계 설치 출장 밤낮이 없어
11시 넘은 내 얼굴 설핏 보는
마누라 눈이 발갛다
언제 내가 어데 가자고 부탁한 적 있냐며
입술도 발개져 집 나간 마누라
어디서 새처럼 앉아 날 쪼고 있는지
사람들 안 다니는 광려천 한 곁 앉았는지
옆 아파트 불 꺼진 계단 쪼그렸는지
가로등 희미한 나무 의자 기댔는지
한 시간 지나
골라주는 옷을 입고
아라비안나이트
마누라와 간다
이젠 나이트 같이 갈 사람이 없다며
친한 동생에게 가자고 했다가

언니는 아직도 춤추고 싶냐는 말에
막 저항하는 것 같고
막 노는 듯하고
남은 밤 없을 듯 무대 점을 찍는다
불빛 반짝이지
마누라 반짝이는지
물 좋은 때는 지났다고 아쉬워하지만
마주 서서 씰룩이는 허리
밤을 부여잡을 듯
지난 시절 불러들일 듯
말라가는 밤 얼른 마셔야 하는 듯 쉬지 않는다
귀 터지는 테크노에 찰싹 달라붙어
뱅글 돌다가 머리카락 내려 흔들고
잠이 쏟아지는 3시
자기야 이제 가자 많이 췄다 아이가
내 눈은 앉을 테이블만 보여도
웃기만 하는 마누라
흔들고 싶은 건지 흔들리고 싶은 건지

10년 만에 놀러 온 마누라 맘 알겠다는 음악은
그치질 않고 옆에서 분위기 맞추던
새벽 5시
이제 개운하고 속 시원하다는 마누라
꼼짝달싹 형편 붙잡고 산다고 뻣뻣해진 무늬
숨막혔을까
아침 출근하며
나도 모르게 뱉는다
마누라 우찌 참았노.

불불불

한 번쯤은
눈 돌아가는 사랑 해보고
한 번쯤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시도 쓰고
한 번쯤은 감당 못 할 횡재하면 좋겠다고
그냥 잠들기 아까운 밤
못 이룬 꿈 혼자 뒤적이다
깨었는데 집이 불타고 있다
다시 눈 떴는데 불타는 집 보이고
잠시 뒤 꺼졌던 불 활활 오른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 불타는 집 꿈
사람들이 말하는 한 방일까
출근길이 붕 뜨고
세 날 동안 하루마다 복권 사야 하는지
아니면 하루에 세 종류 복권 사야 하는지
꿈해몽 들썩이다
로또 1등이 7번이나 나왔다는 회성동 가게
로또 연금복권 즉석복권 만 원씩 사서
거울 서랍에 넣어 놓고 헤벌쭉거리다
즉석복권 천원 당첨에
몇 밤을 긁는다.

와도

바위에 쪼그려 앉아
틈 사이 고동 잡다
파도 튕겨도
밀려가면 손 흔들고
밀려오면 손잡아

나는 자갈 베고 눕고
하늘은 바다 베고 눕고
구름은 섬 베고 눕다가

파도 타는 낮별
주워 모으려고 두 손 담그면

첨은 할머니
내 어릴 때 울엄마 돌아가시고
형과 나 아부지랑
같이 살 집 세 번이나 옮겨가며
개펄 나선 허리 굽은 별

첨은 엄마
날 보는 눈빛 얼굴 희미한데
세월 가도 가도
생각 해도 해도
그리움 손을 씻는 별

몽돌밭 앉아

파란 대문에서 알몸으로 바닷물 들었다 뛰오는
밍밍한 날 보기도 할까
할머니처럼 어머니처럼
누운 섬.

광려천 연가

절에 들어가겠다고 머리를 깎은 아내
뭔지 몰라도
내가 미안하다 잘못했다 했지만
당신 잘못 아니다는 말만 남기고

비 내려도 나비는 꽃을 보고
벌새는 꿀을 따고
거미는 줄을 타는데
딸이 승무원 합격한 날도
아들 군대 갈 때도 생각나지만
어쩌다 한번은
어깨 넓이 만큼 떨어져서
같이 걸을 수 있을까

산새 좋은 곳마다 염불 풍경소리
탁탁탁
광려천 둘레 왔다 갔다
흘린 눈물이 빛을 준비하지 않지만

절망은 아깝다
돌돌 번데기에서도
떨어지는 빗소리 탁탁탁
강물에 퍼졌다 사라지는 아내의 눈웃음.

차수민 | 시인. 고성 삼산 출신. 공동시집 『양파집』과 계간지 『여기』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꽃삼촌』을 냈다. duz9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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