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4호-신작시】 달집태우기 외 9편 - 최영순

장소시학 승인 2024.08.03 11:05 | 최종 수정 2024.08.14 15:09 의견 0

달집태우기

최 영 순

초승달로 생겨나서 그믐달
보름달이 둥싯둥싯 떠오릅니다
달집 속 생솔가지에
바람난 남편 팬티를 하얗게 불태워
액을 막습니다

둥싯둥싯 떠오릅니다
화재 환경 때문이라며
유 세 차 정월대보름 봉화산 기운 받아
계묘년에는 동민 화합과
소상공인에게 희망 주시기를 일동 상향

달무리 바라보며 열두 달 LED 점등식
센스 불빛 달빛이
우리 풍속 사랑하세
쾌지나 칭칭나네 쾌지나칭칭나네.

자목련 내 아내

사업 부도로 아버지 나가시고
엄마랑 셋방 살았다
열다섯 살부터 구두닦이 김밥 찹쌀떡 장사에
건달의 술집에서 공병 수거해 팔다
비 오는 날 자전거 나동그라졌다

주인집 딸이 손바닥에 밴드 붙여주면서
자목련 돌담에 세워놓고
입맞춤 당하던 사월

세 살 연상
임신해도 안된다는 처가
딸 아들 놓고 혼인했지만
꼬이고 맺혀도 잘 핀 내 목련
젊을 적 식탁에는 반찬이 풍성하더니
요즘은 건강식품 약봉지가 줄 서고
못난 나를 금디처럼 우단다.

**금디 : 금덩이
**우단다 : 소중히 아낀다.

겨드랑이

결혼 뒤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아파트 당첨되고
신용대출로 대학가에 당구장 차리니
사업도 쑥쑥
테니스 시합에서도 우승

자취방에서 라면으로 때우는
코치에게 방 한 칸 내주었다

집 전화하면 통화 중
종잡을 수 없는 불길한 예감에
마음 얄궂더니
넘겨짚었는데

각시는

알면서 왜 묻노.

삼순이

하늘이 불콰한 얼굴로 물들어가고
밥은 술이 될 수 없는가
술은 밥이 될 수 있는가
술 없이는 못 살아

하는 게 뭐 있노
밥솥이 밥하고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데
집에 있으면 돈벌이 안 간다고 긁고
눈에서 멀어지면 싸돌아다닌다고 들들 볶고

남자를 깡패로 만드는 여자도 있는지
부엉이 눈으로 마누라 쏘아 보면서
말 막하고 주먹 울더니
벤자민 화분이 쩍 하니 깨지고

나이가 몇인데
참는 것은 딱 여기까지
확 들이 받았으면 좋겠지만

진중 신중해도 쓸데 있나
분노조절장애.

강쇠바람

왜소증 자옥이가 피임시술 후
키 크고 말 못하는 남자와
서로를 보다듬고
바라만 봐도 배불렀는데
이별이 찾아왔다

엄마는 자궁암으로 가시고
도토리 아버지와 한집 살림하는데
목욕탕에서 등 좀 밀어 줄래 하더니

딸래미도 여자
앞뒤로 들이대니 와 와그라는데
쓰러지고
찢어지고

맞다가 까무러치니
술 마시자며 달래고
죽고 싶을 만큼 아프고 힘들었다고.

보리피리

마른 논에 누렁소 써레질 하고
곰방메로 다듬은 두둑에
어둠 속 칼바람 헤치고
파르릇 파르릇

노랗고 작은 꽃이 삐죽 얼굴 내밀면
깜부기는 아이들 간식
삐이늴리 삐이닐리

야들아 보리는 뽑지 마라시며
후덥지근한 땡볕
배꾸마당에 풀 뽑고 가마니 깔아
물 뿌려가며 자근자근 밟으셨다

오죽했으면
찔레꽃 피면 딸집 가지 말라 했을까
어머니 오실 때 길가에 찔레 못 보셨나요

우물물에 된장 간장 풀어 마시며
도리깨로 어이차 여차
까끄러운 까끄라기 목울대에 걸린다.

구멍 난 독

추석 다가오니 엄마가 그랬듯이
시루에 불린 콩
손등 위로 물 흘려 다독다독
통통하게 키우셨지만
수도꼭지 틀어 주니
눈뜨고 꼬리가 불쑥불쑥 자라
물구나무 서고 모로 누워 일주일

물새도 잘 자라는 콩나물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나
눈에 빤히 보여도
이름 떠오르지 않아 말문 막히고
마실 나간 총기는
다음날까지 안 돌아올 때도 있지만

근심 걱정 미움 잊게 해주는
건망증은 내 친구.

꽃 파는 날

꽃 사세요 네
회원복지관 발표회
몽실한 해당화 모란 작약이
달덩이 몸짓으로 너울너울 두둥실
까치걸음 뚜루루룩
미스코리아 포즈에
어깨 너머로 눈 내려 깔고 도도하게
감아 도는 치마폭에 흥을 담아
니나노 니나노오오
얼씨구 절씨구 좋다
꽃타령에 고개 숙이는 얌전한 백조
해당화 모란 작약이
꽃 사세요 네
사랑 사랑의 꽃 사세요

순서 잊어 삐모 앞이 하얗다
아구 숨차다 아이구 아이구.

못다 한 사랑

오일장에서 하얀 애기 한 쌍
모아 모아 데려온 자매가
먹이 재미에 푹 빠져
눈 비비고 달려가는 아침인데
쫑긋쫑긋 반겨주는 빨간 눈 사라지고
십 원 지폐가 나비처럼 팔랑인다
찾다가 슬피 우는 내게
엄마는 아는 도둑이구나 하셨지만
서운함이 박혔다

손녀 토끼 앞세우고 경로우대
껑쭝 껑쭝 실로폰 울리는 작곡
거꾸로 쪽배 타고
엉덩이 둥실거리며 불로초 찧는 달 토끼
뒷다리 긴 산토끼 우다다
앞다리 짧은 집토끼 댄스에
마음속 애토끼를 보낸다.

분꽃씨

첫인상 의젓하고 매력 넘쳐
남자 중에 남자
참으로 벅차고 든든했습니다

내외 일 년에 긴 이별
북해도에서
까만 씨 가슴에 박힌 요시코는
당신이 있는 통영으로 돌아가고파
안달이 납니다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채워지지 않는 허기
죽을 만큼 외로움에
속은 타서 숯검정 되는데

배짱 센 무사태평 당신은
편지글에 목을 메게 하니 가혹합니다
설령 하루밖에 살 수 없다 해도
기필코 반드시 만나야 해요

한국으로 돌아오는 배
심술궂은 운명과 신의 질투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어요
당신은 싱글벙글 나는 쌩긋쌩긋.

최영순 | 시인. 함안 출신. 공동시집 『양파집』과 『문학고을』 신인작품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아라 홍연』을 냈다. ms2924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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