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4호-신인상】 신명자 - 낮달 외 24편

장소시학 승인 2024.05.24 15:56 의견 0

낮달

신 명 자

이왕 하는 것 입에 달고 사는 남자
이름 붙은 채소는 다 심어 놓고
닭 고양이 토끼 농막 식구 만들더니
서리 맞은 정구지
낮에 잠시 현관에 떴다 사라지고 나면
채소 봉다리 거실에 장 섰다가
냉장고에서 시들고,
남편, 농막에서 시든다.

양촌 온천

오후 2시
마을버스에서 내린 사람들
탕 안으로 몰리고
뒤 따라 소사나무 분재 같은 할머니
때밀이 아줌마가 받쳐 들고 와
욕탕에 앉힌다
평생 호미와 살았다고 몸으로 새기는 글자
기역 디귿 니을
탕 안에서도 팔월 태풍에 흔들리는
고추나무.

할머니는 박보살

주방 흰 타일 벽
까만 땅거미 한 마리
글자를 써 내려가 듯 기다 서다 기다가
멈추며 물음표를 찍는다

아침부터 나에게 던지는 화두
나물 데친 물은 식혀서 도랑에 붓거라
게 사는 실지렁이도 생명이니,
할머니 말씀 떠올린다.

아버지의 봄

망산 아래 낮은 산 끝자락 저수지
괭이 삽 따꾸질에
봄 내내 들도 산도 울었다
이레 일하면 배급 밀보리쌀 한 말
바닥 보이던 쌀독 메꾸고
점심밥 지어 소쿠리 담아
채 아물지 않은 둑 기어오르면
업장처럼 따꾸 밧줄 어깨에 매고
몸 속 물 펌프질 하시던 아버지

일본 히로시마 강제 징용으로,
경인년 전쟁터로,
부역이 몸에 익어
일 주일 밀보리쌀 한 말에도
나라님 은혜가 왔다고
봄을 움켜쥐셨다.

* 따꾸(달구)-통나무에 밧줄을 매어 땅을 다지던 도구.

무명 용사

허리띠 졸라매도 비집고 들어 갈 인심은 있어
봄 질 무렵 되면 아침 밥때마다 사립문 기웃대는 남자들
어머니는 사이군 또 왔다,
따신 밥 좀 퍼 줘라 하셨다

미국에서 건너온 분유 깡통과 낡은 군모 밥통
집집 얻은 꽁보리밥 위에 우리 밥 얹어 줄 때
해진 군복 사이 기둥처럼 서 있던 외다리에 갈고리 손
움직일 때마다 쇳소리 났지만
두 눈은 별 계급장.

어떤 고백

바닷물은 늘 비릿했다
매일 해를 낳기 때문일까

산달섬 어깨 너머 저 노을만큼 붉지도 않는
두 사람 이 긴 선창을 왜 함께 걸었을까

여자 키가 너무 크면 매력 없어요
너무 약해도 좀 그렇죠

독백처럼 남자가 흘리던 말, 그땐 몰랐다
그 여자.

갈곶리

오늘은 막차가 빠지는 갑다
이 밤에 우짤라꼬
고마 우리 집에 자고 날 새면 가제
한목 버스정류장 점빵 아지메 걱정 앞선다
아이 삼촌 대학 2학기 등록금도 내일 막차
어머님께 콩 튀듯 부탁한 돈
내일 새벽 첫차 타고 마산 돌아가야 했다
백일도 안된 둘째 아이 둘러업고 어둡길
한목재 올라서니 샛바람 먼저 마중 나왔다
전신줄과 소나무 아우성에
감나무골 처녀귀신 생각 겹치니
사시나무 내 다리
돌부리가 걷어찼다

아이 엉덩이 꼬집어
등불 같았던 울음소리
켜면 꺼지고 켜면 꺼지고.

진을수 여사

뙤약볕이고 앉아 미역단 다듬던 손 끝엔
자식 일곱 학비가 매달렸고
남편 술값도 전대를 찼다

샛바람도 밤이면 잠을 잔다고
어둠 내리는 선창 미역 가득 실은 부산 뱃길 창성호
서이말 등대 물길은 밤에도 잠들지 않아
파도 달고 날아오르던 배 바닥, 쪽잠 그녀도 날아올랐다
새벽 남포동 건어물 상회 미역 풀어 놓고
쌀 고구마 이고 들고 영도다리 걸어서
신선동 중학생 아들 자취방까지 갔다 왔다
숨 돌릴 틈 있었을까
동태 다라이 이고 배에서 내리시던 그녀
자글자글 미역귀 모습.

달리기

여차 너머 항개 백 씨, 갈곶리 양 씨,
다포 우리 아부지 아들 낳기 달리기
다섯째 막내딸 고추밭에 터 팔아 남동생 태어나니
아부지 일찌감치 결승점에 깃대 꽂으시고
백 씨 양 씨 계속 달린다
백 씨 여섯 번째 딸 낳으면 양 씨 따라 여섯 번째 딸
양 씨 일곱 번째 딸 낳으면 백 씨 따라 일곱 번째 딸

숭어 망재비 양 씨
숭어 떼는 맞추면서 아들 물때는 못 맞춰
여덟아홉 번째도 딸딸
백 씨도 뒤질세라 아홉 번째 따라 잡는데
드디어 결승점에 먼저 도착한 양 씨
두 손 번쩍 들어 올리며
내 아들 불알이
하늘 댕구만 하요.

* 댕구-조선시대에 만든 지름 30센티 크기의 대형화포

공양

아버지 술에 젖은 날 저녁이면
밥상 앞에 앉은 어머니 잔소리 군불 지피고
도래상 둘러 앉은 다섯 숟갈
기침소리도 도로 삼켜야 될 무렵이면
십중팔구 아버지 밥상 마당으로 날아오르고
너릉바우 공양 받는다

염밭 가 우리 집 태풍 사라에게 먹힌 후
물 가가 무섭다고 동네에서 제일 높은 곳에 집 지었고
텃밭 돌무지로 아버지 손수 담장 쌓고 축대 앉힐 때
너릉바우 하나 꿈쩍 않고 아버지와 맞짱 떠
마당 가운데 터줏대감 되었다
어머니는 못 낳던 아들 이 집 이사 와서 둘이나 얻은 건
순전히 저 바우덕이라며 복바구 복바구 떠 받들면서
공양은 늘 아버지 몫.

작은할메

농로 옆 무논
왜가리 한 마리 논바닥 쫀다
작년엔 짝지어 새참 개구리도 나누어 먹더니
한 마리 어디로 갔을까

품앗이도 못할 삼각배미
무논에 무릎 팔 고이고 모심던 작은할메
런닝구 사이로 젖꼭지도 삐져 나와
모손 거든다

외아들 매물도 바닷길에 먼저 보내고
새참 챙길 새도 없이
늘어진 어깨 어둠 업을 때까지
꽁당꽁당.

감자에 싹이

수컷이 밖을 돌기 시작하자
암컷 목이 길어졌다
처음은 나갔다 온다 싶더니
외박을 시작하고 며칠 보기 힘든다 싶으면
나타나 배 채우고 사라지는
농막 세 살 숫고양이

퇴근길 늘어 선 술집은
형님, 누님 집
내 목 길어져도
아침 해 그림자 밟는 남자

북어채 참기름에 덜덜 볶다가
물 부으면 부르르 끓어오르고
파 썰어 달걀 툭 깨어 저으면

달걀 속 터지고
내 속 터지고.

통영댁

옆 침대 혈액암 환자
엄마를 자꾸 조모, 조모 한다
할머니를 조모라 부르는 거제 통영 사람들
갯바람 맞고 자란 탓일까
성질도 걸음걸이도 파래처럼 팔팔한데
밥때마다 떠난 입맛 살아온 이야기로 달랜다

나가 처니 때
아는 오빠 소개로 토영 항남동 찻집에 선을 보러 나갔는데
저녁이라 차 대신 그 남자가 권한 맥주 딱 한 잔 마싯는데
눈 떠 보이 여인숙인기라
창문을 보이 아침 해가 발름하게 떠 있고
내 꼬라지 보고 억장이 무너져 울다가 울다가
사람들 볼까 신발 살찌기 들고 나와 우리 집에 들어서는데
우리 아부지 몽디 들고 삽짝에 서 있다가
사정없이 내 어깨를 내리치고는 그 남자 아부지
어장막으로 끌고 갔는기라
그란데 그 인간 숨겨논 여자가 있었는데
지 아부지 강요에 못 이겨 선보려 나와 가꼬
나를 평생 속 시린 개살구로 맹글어 삔기제
그래도 아가 들어 설라카믄 나한테 오는기라
우리 큰 딸이 그날 밤 들어선 아 아이가
그 아가 서른 넘어 오토바이 사고가 나
먼저 가삐는 바람에 그만 속 골병 들어삐가.

벚꽃 피면

창원병원 누우신 지 석 달
벚나무 가지에 물 오르고
어머님 가슴에도 물 차 올라
통증은 밤낮 없었다

창 너머 내동 사거리
벚꽃 활짝 두리번거리던 밤
황색불 깜박깜박 어머님
어멈아, 어멈아
가늘게 흘리신 소리

내 잠귀는 꺼져 있었다.

아오자이

함안 연꽃테마공원 뒤쪽
밥집 찻집 늘어선 화단에
겹주름 맨드라미 칠월 햇살 망보고 있다

웅이엔 항
열아홉 나이 창원에 뿌리내려
다섯 살 두 살 아이 두고 의료사고 남편
양산 부산병원에 실려 가도 식어가는 모습
지켜보던 겹겹 울음
사망 보험금 팔천만 원

베트남 남자 망봤을까
카톡 카톡 울음소리
아이 둘 시누이 몫이다.

말금이

큰 형님 막내 며느리 이름은 말금이
막내딸이라고 친정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을
형님은 맑음이 맑음이 부르신다

전화기 속
맑음이
네, 어머니
두 목소리 면경이다.

삼재일

가라산 아래 관음사 법당
어머니 영정 앞에 엎드려 금강경 펼치는데
대웅전 앞 키 큰 소나무 가지에
두 까마귀 울음 주고받는다

해거름이면 장수 묏가에서도
우리 집 빈 마당 내려다보며 울어주던 낯익은 소리
그 시간 기우뚱 다리가 다리를 밀고
마당을 들어섰을 어머니
경로당 오가며 먹이 챙겨 주었다고
극락왕생 빌어주는 걸까

나보다 어머니 안부를 더 챙겼을
저 울음소리.

박산 할메

어디서 날아온 민들레 홀씨였을까
우리 집 담장에서 내려다 보면 둥천 건너
첫 빨간 양철지붕에 뫼똥만 한 집
흘러내린 담장 너머 손바닥만 한 마루 끝엔
망부석처럼 서 있던 지팡이 하나

동네 사람들은 백 살이 넘었다고 했고
할머니께 나이를 물으면
사람이 백 살 넘으면 나이가 없다며 손사레 치셨다
명주실 같이 가는 흰 머리에 뽀얀 얼굴
사람도 백 살 넘으면 신선이 될까

선거 날이면 새벽같이 면사무소 지프차
할머니 모시려 오고 포구나무 가지처럼 휜 허리는
지팡이가 모시고 나왔다
할머이 오늘은 꼭 한 사람한테만 꾸우욱 찍으이소
이장님 신신 당부해도

이 보시게 인심이 그리 야박해서 쓰겠는가.

이화

남편 죽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마귀를 잡았다며 집 뛰쳐 나온 여자
색기에 눈 어두워 초등학생 외아들을 잡았다는 소문이
어망 멸치 떼처럼 한동안 파닥거렸다

남새밭 오가며 나누던 인사 식지 않았는데
고향 제주도로 갔다고 했고
감방으로 갔다고도 했다

몇 년이 더 흘렀을까
고향집 언덕 아래 빈집 팔렸다
그리고 작은 교회 들어섰다

새벽마다 종을 울리는
전도사 이화.

선이 할메

할베 돌아가실 때 할메 빛도 거두어 가
해 뜨면 해 질 때까지 해바라기 화분처럼
마루에 앉아 발자국만 읽습니다
동쪽 서쪽 사립문 두 개
할메 귀처럼 열려 있는 집 위에 고상집
고씨 성을 가졌다고 고상
장난끼 넘쳐 별명이 고상 닷되 씨
할메 끼니처럼 들락거리면
아이구 나가 이리 살몬 뭐 하건노
쥐약이라도 있으면
쥐약이라도 있으면,
아흔 넘은 넋두리에 고상 닷되 씨
장난끼 한 말로 넘쳤을까요
옥진이 점빵에서 활명수 한 병 사 와
할메, 쥐약입니다
병마게 따 드릴까예?

할메 손이 허우댑니다
저 우 선반에,
저우 선반에 올려두시게
나중에,
나중에.

* 고상-고봉
* 되-곡식을 재던 용기

문씨

대낮부터 마신 술 안방문 댓바람 타고
여자는 윗집 아랫집 헛간 찾는 다람쥐
큰딸 순이 마산 자유수출지역으로 달아났다

동네 목수 문씨 그 손재주가 웬수
마누라 놓치면 집안에 딸린 가재도구
몽땅 마당으로 내모는데
손에 눈금 자 달렸을까
제 손으로 고칠 수 있는 것들만 골라 내몰아 놓고
다음날 새벽부터 망치소리 톱질소리
온 동네가 욱신거리고
한 집 건너 우리 집은 더 욱신거렸다.

무시와 고메

아이 셋이라며 셋방 거절 당하고
너네는 아이도 안 낳냐
무시 밑구멍 같은 인간들!
쏘아붙이고 돌아섰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등등

고구마 줄기 되고 싶어도
나라에서 무시만 심으라 하니
출근 남편도 포스터 들고
집집이 무시 밑구멍 만들려 다녔다.

동백꽃

들 논 새집 지어 이사 올 때
까탈스러운 영감 심어 놓은 울타리 동백나무들
가을 되면 영감 잔소리처럼 꽃 열렸다가
늦봄 질 땐 툭툭 영감 혀 차는 소리
화단 가 채송화도 심어 해 뜨고 지듯 붉고 노랗게 피었다
동백나무 아래 찌우퉁 다리 유모차 베고 앉아
고추 오이 가지나무 심어 거름 주고 물 주며
눈물 찔끔찔끔 키우시던 어머니.

노란 민들레

뱅기 타고 날아온 딸 식구들
앉고 누워 거실 채운다
다섯 살 율리
장난감 널어놓으며
아빠 나라 말
엄마 나라 말
조물조물 피어낸다.

이혼 서약서

마스크 위로 이마 눈 닮은 젊은 남자와 여자
책상을 마주하고 있다
합의는 다 했나요?
법무사가 묻고 남자는 이혼 각서를 내밀며
네, 이혼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뒤 따른 여자의 목소리
내가 언제 이혼한다고 했어?
난 그런 말한 적 없어!
또 봐라, 늘 이런다니까요
그래서 이 증거를 남겨 놓아야 해요

함께 가던 길 버리려 왔다가
다시 담은 그 여자 모습
내가 왜 온종일 버리지 못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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