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절영마의 고장 부산과 말의 역사 속으로
엄영석 (한국마사회 부산경남지역본부장)
말, 인류의 벗
1만 년 전 지구상에는 4,000여 종의 포유류가 있었다고 한다. 인간이 가축화에 성공한 포유류는 약 10여 종인데 식용의 목적이 아닌 이용(탈 것)의 목적으로 사용된 가축 중 하나가 말이다. 인간과 말은 수천 년에 걸쳐 서로를 알아가고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알아내 신뢰를 구축했다. 최초의 말 화석 기록은 약 5,50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에오히푸스에서 시작된다. 초기의 말은 지금의 말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크기도 개 정도로 작고 각각의 발에 여러 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있었다. 앞발에 세 개, 뒷발에는 네 개가 있었다. 초기의 말이 진화를 통해 풀을 뜯으면서 동시에 주변 상황을 잘 살피기 위해서 눈과 입이 멀어지면서 얼굴이 길어졌고 빨리 도망가기 위해서 세 번째 발가락이 길고 강해졌으며 세 번째 발가락이 결국 발굽으로 진화했다. 또한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 다리가 길어졌으며 체구에 비해 에너지 소비량이 적은 식량 절약형 동물로 변화했다.
처음 말과 인간의 관계는 여타 동물과 같이 사냥꾼과 사냥감의 관계였다. 그러던 중 고대의 어느 누군가가 인간 근처에 얼씬거리는 말을 잡아 기르기 시작하면서 가축화가 이루어졌고 또 어떤 누군가는 말의 움푹 파인 등짝 위에 올라타는 무모한 시도를 하면서 말을 좀 더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말과 전차가 등장하고 승마 기술이 보급되면서 기병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출현했고 인간의 정신이나 의식 저류에 완전히 새로운 개념인 속도라는 관념이 각인되었다. 말은 당시 가장 빠른 이동 수단으로서 정보의 전달과 상업의 발달, 군사력의 발전, 언어의 전파 등을 빠르게 견인했고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 문화 교류, 종교의 확산, 과학기술의 전파, 대제국의 탄생을 가능하도록 하였다.
말이 문명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는 유라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 발달의 과정을 살펴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흔히 사람들은 영화 속 아메리카 인디언이 말을 타는 모습을 보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고대 시대부터 말이 존재했고 유라시아 대륙에서처럼 말을 이용해 왔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고대 말 화석의 연대기를 보면,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약 1만 년 전부터 말이 사라졌고 16세기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잉카 제국과 아즈텍 제국을 전염병과 총으로 정복할 때에서야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다시 등장했다. 아메리카 제국의 전사들은 말의 발굽 소리와 모습에 기겁하고 말았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은 나름대로 고도로 발전했지만, 스페인의 코르테스와 피사로가 정복했을 때는 유라시아 대륙의 고대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말이 존재하지 않았던 아메리카 문명은 속도감을 갖고 전파되고 확산될 수 없었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만약 아메리카 대륙에 말이 계속 존재했고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오래전부터 말을 이용해서 문명의 진보를 경험했다면 지금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세상은 유라시아 대륙을 중심으로 움직였으며 이러한 세계관 속에 말은 중요한 자원으로 인류사에 큰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 새로운 동력이 생겨나면서 말이 수행했던 역할은 배와 열차, 자동차가 대체하게 되었으며 말은 주로 스포츠와 레저 활동에 한정되어 이용되고 있고 최근에는 사람과 교감하는 힐링의 대상으로서 여전히 인간 곁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반도와 말
동아시아에 말이 처음 나타났을 때는 중지(中指)만 크게 발달하고 나머지 2개의 발가락은 퇴화 과정에 있는 히파리온, 즉 삼지마(三趾馬)였다. 한반도에서도 이러한 삼지마 화석이 평양시 상원군에서 발견되었다. 구석기 시대로 추정되는 말의 화석이 전국에서 발견된 것으로 볼 때 구석기 시대부터 말이 사냥의 대상으로 고대 한반도인과 가까이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도 말이 서식했던 증거들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 시기 말의 종류와 가축화의 시기는 불분명하다. 다만, 철기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경북 영천의 마형대구(말 모양으로 된 허리띠를 죄는 쇠)의 양식(스키타이)에 정교한 문양과 굴레가 새겨진 것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이미 청동기 시대부터 말을 가축으로 사육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한반도의 말 관련 최초 문헌은 중국 역사서 사기의 조선 열전인데 한무제의 고조선 침략과 관련되어 말과 기마병 보유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우리 역사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고대국가 부여, 고구려, 신라와 관련해 말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이렇듯 각종 문헌과 발굴된 유물 등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에는 고대국가 시대에 북방 기마 민족과의 교류를 통해 기마 문화와 체격이 큰 말들이 유입되었고 철기 문명을 바탕으로 높은 수준의 기마 문화를 창달하였으나 한반도로 활동 영역이 축소된 이후 산악 지형과 농경 중심 사회의 정착으로 더 이상의 발전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말은 모든 시대에서 국방, 통신, 운송 등에 필수적으로 활용되어 모든 왕조에서 마사(馬事)진흥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원(元), 명, 청 등 인접 강대국의 대량 징발과 민간의 말 수요 억제 등으로 산업적 위상은 점차 쇠퇴하였으며, 특히 조선 중후기에는 주자학 기반의 유교적 통치와 말 사육자에 대한 수탈, 신분적 불이익 등으로 말 사육이 매우 피폐하게 되었다. 이는 고려시대 8만 두 이상으로 추정되었던 사육 규모가 조선 후기에는 3만 두 수준으로 감소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더욱이 조선 후기 국력 약화와 일제강점기, 6.25 전쟁 등을 겪으면서 한반도 마정(馬政)과 말산업은 더욱 피폐해졌다. 근현대를 겪으며 기차와 전신, 자동차 등 운송 통신 분야의 신문물 도입과 과학기술의 발달로 한반도에서 말의 이용은 극히 제한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고 현재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스포츠와 레저로서 경마와 승마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 경마의 역사
한국에서 근대적 의미의 경마의 태동은 1897년 훈련원(조선시대 무과시험 등을 담당하는 관청)에서 거행된 연합운동회 육상경기 종목의 하나로, 외국인 교사들이 지도한 나귀 경주가 그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일본의 국권 찬탈로 인해 경마 시행의 중심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고 체계를 갖춘 경마는 1922년 조선경마구락부에 의해 최초로 시행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성을 비롯하여 부산, 대구, 신의주, 함흥 등 전국 9개 지역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경마장이 운영되었다. 해방 이후 경성기도회(京城騎道會) 등에서 활동하던 승마인을 주축으로 하여 미군정의 도움을 받아 조선마사회를 인수하고 '한국마사회'로 개칭하여 그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1960년대까지 한국 경마는 조악한 수준에 머물렀고 종사자의 급여를 주지 못할 정도로 적자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외산 경주마 수입을 통한 경마 상품의 질 제고, 시설물 개보수, 장외 발매소 운영 등의 개선 조치를 통해 1972년 드디어 경영수지가 흑자로 전환되었다. 1980년대 이후 한국의 고도성장과 국민의 레저 수요가 폭발하면서 한국 경마는 2000년을 전후해 연 매출 8조에 이를 정도로 성장하였다. 또한 외국산 마 위주의 경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내산 마 생산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여 국내 경주마 생산 농가를 양성하고 경주마 육성 인프라를 구축하여 국내산 마가 경주마의 거의 80%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으며, 현재는 연간 약 1400여 두의 국내산 마를 생산하는 세계 12위 정도의 경주마 생산 국가가 되었다. 이러한 성장 과정에서 경마뿐만 아니라 승마를 포함한 말과 관련된 다양한 분야를 육성하기 위해 2010년 말산업육성법을 제정하고 말산업 육성 종합계획에 따라 폭넓게 말산업을 육성하고 있고 경마는 국제 경주 시행 등 국제화를 통해 양적, 질적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부산과 말
부산에는 현재 강서구 범방동과 경남 김해시 수가리에 걸쳐 부산경남경마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이렇게 딱 절반으로 나뉘어 부산경남경마장의 행정 구역이 정해진 것은 부산시와 경상남도의 경마장 유치 경쟁으로 인한 것이었고 결국 양 광역자치단체의 설치 합의에 의해 지금의 위치로 정해졌다. 이렇게 함으로써 매년 경마 매출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레저세 약 1,400억 원이 해마다 부산시와 경상남도에 반반씩 세수로 잡히게 되어 지방 재정에 기여하게 되었다.
부산경남경마공원은 2005년 9월 개장 이래 한 해 최고 약 100만 명이 찾는 지역의 나들이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실제로 부산도시연구원이 KT 생활 인구 빅데이터 기반 분석을 통해 봄철 부산 시민과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핫플레이스'를 조사한 결과, 해운대 해수욕장이 1위를 차지했고 2위는 서면, 부산경남경마공원은 9위를 차지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경마장을 찾는 인원이 다소 줄어들기는 했으나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는 올해도 공원 내 투어 기차 운영, 젊은이들이 참여하는 컬러 레이스, 여름철 가성비 높은 가족 단위 물놀이 행사, 각종 승마 체험 등 다양한 이벤트 행사를 통해 부산경남지역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휴식처가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부산 지역에서 말과 관련된 역사는 수많은 역사적 기록이 있겠지만 특히 근대사에 있어서는 1931년 서면 경마장(지금의 부산시민공원)이 있고 고대사에서는 영도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고대 말목장 영도
원래 지금의 영도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절영도(絶影島)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가 과거 영도에 국가에서 운영하는 종마 목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자란 말이 워낙 빨라서 달리면 그림자가 끊어져 보이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과거 영도는 초지가 넓었으며 말 키우는데 방해가 되는 맹수도 없고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과 가깝기 때문에 말을 키우기 좋은 곳이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편에 보면 신라 33대 성덕왕이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의 공을 치하해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에게 절영도 명마 한 필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에도 926년 후백제의 견훤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절영도산 명마 한 필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부산 영도에서 생산된 말이 당대에 매우 우수한 말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서면 경마장
부산에서 본격적인 현대식 경마가 시작된 것은 일제강점기이다. 당시 한반도에는 서울을 비롯해 부산, 대구, 군산, 함흥, 청진 등에 9개 경마장이 운영되어 중절모를 쓰고 한껏 차려입은 아버지들과 아이들이 경마를 보기 위해 임시로 편성된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 당시의 경마는 지금처럼 연중 개최되지 않고 1년 중 벚꽃 개화 시기와 단풍철, 두 차례에 걸쳐 한반도 아래에서 위로 또는 위에서 아래로 돌며 개최하는 순회 경마 형태로 진행되었다. 개최 도시의 거리에는 대회 전부터 포스터가 나붙고 악대를 앞세워 시가행진을 벌였다고 한다. 꽤 흥행을 이루던 지방 경마장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된 태평양 전쟁과 그로 인한 경기 침체로 1941년 군산 경마장을 시작으로 하나하나 문을 닫았다.
이중 부산 경마의 역사를 보면 1924년 조직된 사단법인 부산경마구락부가 1927년 설립인가를 받았고 1930년 11월 18일 당시 부산 교외였던 동래구 서면 범전리에 면적 약 4만 8천 평, 1,000m 규모의 주로를 갖춘 경마장을 준공했다. 준공과 더불어 시행된 경마에서 마권 발매 186,280장, 마권 매상 372,560엔으로 9개 공인 경마장 중 서울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서면 경마장이 들어서기 전에도 부산의 경마는 여러 장소에서 열린 바 있다. 초량역(구 부산역) 근처 해안 매립지, 연산리(현재 연산교차로에서 안락동 방향 일원으로 추정), 동래 온천장 입구, (구)조선방직 광장에서도 경마를 개최한 바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열린 부산 경마는 인근 지역민의 장거리 여행까지 유발했다. 1924년 동아일보에는 경남 밀양의 신문 구독자 대상으로 부산의 추계 경마 관광객을 모집하는 광고가 실렸다. 10월 19일 당일 오전 8시에 밀양역에서 출발, 오후 9시에 돌아오는 여정이며 차비 1원 50전을 내면 당일 중식비는 지국에서 부담해 준다는 내용이다. 상춘이나 단풍놀이처럼 단체 경마 관광의 풍조가 생겼던 것이다. 서면 경마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서면 경마장이라고 불리는 장소가 실상 3개의 경마장을 포함한다. 가장 먼저 문을 연 곳은 부산시민공원 내에 뚜렷한 주로 형태가 남아 있는 부산진구 범전동 64-3에 해당하는 제1 서면 경마장이다. 이 경마장 터에는 중일 전쟁이 터지자, 처음엔 일본군 기마 부대가 들어섰고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된 뒤로는 병참 경비대가 주둔했다.
해방 이후 부산 경마가 터전으로 삼은 곳은 기존 제1 서면 경마장 동쪽에 위치해 있던 연지동 130번지 일대 국유지이다. 1946년 이곳을 임대해 임시 시설을 갖추고 경마를 재개했는데 이곳이 바로 제2 서면 경마장이다. 일본이 패전 후 미군이 부산에 주둔하면서 제1, 제2 서면 경마장은 하야리아 캠프라 불리는 주한 미군 기지로 탈바꿈한다. 인디언 말로 '아름다운 초원'이라는 뜻의 하야리아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경마장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부산시민공원 역사관에는 서면 경마장이 일본 병참 경비대와 포로수용소를 거쳐 미군 주둔지 그리고 다시 시민공원으로 변화한 질곡의 역사가 남겨져 있다.
마지막인 제3 서면 경마장은 한국 전쟁이 끝나고 몇 해 뒤인 1956년 봄, 하야리아 부대 동쪽 부산진구 범전동 산 2번지 일대 골짜기를 깎아 길이 360m 미니 트랙을 설치하고 경마를 열었다. 하야리아 부대 내부의 제1, 제2 서면 경마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서 제3의 장소를 마련하게 되었다. 경주 자원도 기수 10여 명과 조랑말 70여 두 뿐이었고 전쟁 후 열악한 상황에서 모든 것이 약식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제3 서면 경마장이 1957년 여름까지 부산에서 마지막 경마를 시행한 장소이다. 제3 서면 경마장 터가 있었던 곳에는 목욕탕, 방앗간, 식당 등 상점과 도로에 아직도 경마장이라는 이름이 여전히 남아 옛 역사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유물의 땅, 경주
사실 하야리아 제3 서면 경마장 이후 부산에 경마장을 유치하려는 움직임은 과거부터 꾸준히 이어져 왔다. 꽤 구체적인 논의가 오간 시기는 1980년대 말부터였다. 당시 부산시가 해상 신도시 건설을 추진하며 경마장 설치를 그 계획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섬에 경마장을 설치하는 방안은 곧 환경 단체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합의점에 이르지 못한 채 "부산'에서 ''경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땅 밑에 묻혀 있던 선조들의 유산으로 인해 제동이 걸려 버렸다.
부산 (범방동) 경마장
1957년 부산 서면에 마지막 경마가 시행된 후 약 48년 만인 2005년, 다시 부산에 경마장이 완공되어 새로운 말산업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부산시가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을 준비하면서 아시안 게임을 대비해 건설할 승마 경기장을 사후 경마장으로 활용하는 계획(안)을 1995년 8월 중앙 정부에 건의해 부산경마장 유치를 진행하던 중 경상남도가 경마장 유치에 뛰어들면서 결국 양 지자체의 합의 하에 양 시, 도에 걸쳐진 상태의 경마장이 된 것이다. 그래서 경마장 이름도 부산경남경마공원이 되었다.
부산경남경마공원은 올해로 어느덧 개장한 지 20년이 되어가고 있다. 한때는 한 해 입장 인원이 100만 명을 돌파하기도 하고 매출액에 연동되는 레저세가 2,000억 원에 육박하기도 하였다. 코로나 이후 입장 인원과 매출액이 다소 주춤하고 있으나 여전히 많은 가족 단위 나들이 고객이 방문하는, 저비용으로 다채로운 행사를 즐길 수 있는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경마뿐만 아니라 방과 후 활동과 승마를 연결한 찾아가는 승마학교, 고령자와 암 환자들에게 포니와 직접 교감하며 건강한 감수성을 키우게 하는 힐링 승마 등 말과 관련 각종 행사를 진행함으로써 오랜 역사 동안 인간과 함께 해왔던 말의 문화를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늘도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는 절영마의 혼과 정신이 살아 뛰고 있다.
<참고 자료>
「세상을 바꾼 길들임의 역사」, 엘리스 로버츠 지음/김명주 옮김
「말의 세계사」, 모토무라 료지/김효진 옮김
「한국 경마 100년사」, 한국마사회
“한반도의 말산업의 변천 과정 및 남북 협력 방안”, 류원상
“일제 강점기 부산 ‘서면 경마장’의 조성 과정을 통해 본 (구)하야리아 부대 이전 부지의
도시사적 의미”, 이금도, 서치상, 강윤식
“한국 경마 100년의 흔적, 부산경마장을 찾아”, 김정희
<엄영석 (한국마사회 부산경남지역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