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물권색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저곳의 다섯 공리公理 axiom>
1. 일찍 들어오고 늦게 들어오고 선후배 없이 다 똑같은 동등한 존재다. 존대말 없이 서로 말을 터도 된다.
2. 살아생전에 언제 어디서 살았던 다른 지역에 대해 대충은 안다. 시공간 초월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3. 이승에서의 집착을 다 비워 버려야 하지만 아직 미련이 있다. 물권색 욕망이 강한 인간의 관성 때문이다.
4. 한 방에서 이성끼리 대화하다 방이 바뀌며 이성 상대가 바뀐다. 덕분에 저곳에서의 생기가 은근히 살아난다.
5. 저곳에서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최종 정착지가 정해진다. 그러니 저곳은 중간 경유지가 된다.
45. 무식과 신희
넌 어디서 온 여자야? 아주 이쁘진 않아도 쫌 세련되어 보이는데. 이지적으로 보이네. 요즘 젊은 여자들은 이지적으로 보인다고 하면 나 그렇게 쉬운(easy) 여자 아니라며 성낸다고 하더군. 무식한 년들! 나 무식이가 무식한 년들이라고 하면 정말 무식한 거야. 이지적으로 보인다는 건 이치 이(理)와 지혜 지(智)를 합친 낱말이니까 이치에 어긋나지 않고 지혜롭게 보인다는 뜻이야. 칭찬이지. 신희 넌 왠지 이지적으로 보여.
너 무식이라고 했나? 너 정말로 무식하네. 날 보고 이지적이라고 보인다고 칭찬하는 건 좋은데 어디 처음 보는 사이에 이쁘지 않네, 세련되어 보이네 하고 그래. 버릇없게… 무식하게. 아무튼 난 절대로 쉬운 EASY한 여자 아니야. 이지(理智)적인 여자 맞아. 남자들은 나의 이지적인 매력에 빠져 들었지.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오지 못했어. 나는 나한테 달려드는 남자들한테 아주 혹독한 여자였어. 나쁜 여자였지. 나는 여자로서 좀 특이한 점이 있는데 똑똑한 남자들한테는 성적 매력을 전혀 못느꼈지. 당대에 기라성같은 똑똑한 남자들이 나를 성적으로 가지려 해도 나는 절대 허락하지 않았어. 남자들은 환장했지. 미쳐가기고 했어. 어떤 남자는 결국 자살까지 했어. 내가 지들한테 내 몸을 주지 않았다고. 그렇다고 내가 성적 불감증에 걸린 여자는 아니야. 다만 똑똑한 남자들한테 그랬다는 거지. 오히려 난 그냥 평범한 남자들한테는 여자로서의 문을 열였지. 섹스를 즐겼어. 그 때 나는 이지적인 여자가 아니라 도발적인 여자가 되기도 했지. 난 매우매우 아주아주 무척이나 희한한 년이었어. 내가 날 봐도 그래. 그러니 남자들이 날 보면 얼마나 희한한 여자였겠어. 지금 와서 보니 왜 그랬나 싶어.
내가 너한테 초면에 너무 무례하게 군 게 미안했는데 네 말 듣고 네가 그런 희한한 여자였다는 걸 알고나니 미안함이 사라지네. 그 희한함이라는 게 널 사랑하려는 남자들한테 괴로움을 주는 희한함이지. 좀 욕이 나오려고도 하네.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가 자기의 몸을 남자에게 허락하지 않을 때 남자는 심적 정신적 허탈감이나 무력감을 느껴. 그 것도 나름 똑똑한 남자들이라면 더욱 그렇겠지. 여자들은 그런 남자들의 괴로움을 몰라. 네가 그렇게 너의 몸을 허락하지 않은 남자가 한둘이 아니겠다. 여럿이겠다. 어떻게 정신착란이나 자살까지 하도록 그 남자들을 괴롭게 내버려 두었니? 결혼은 하지 않더라도 뭔가 위로라고 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네가 뭐 그리 잘 났길래. 똑똑한 남자들을 농락할 수 있었던 거야. 너 이상한 년이네. 요상한 년일세. 매정한 년, 비정한 년! 나쁜 년, 못된 년! 넌 좀 벌 받아야 하겠어. 그렇다고 중벌은 아니니까 염려는 하지마. 다만 남자들을 괴롭게 한 벌은 받아야 하지 않겠어.
아니 내가 무슨 큰 죄를 저질렀다고 벌을 받아. 나 죄지은 거 없어. 그냥 남자들 마음에 상처를 준 거 뿐이야. 그 게 무슨 죄야. 사과를 할 마음은 있지만 사죄를 할 정도는 아니야. 너 너무 남자들 편에서 나를 단죄하려는 거 아니야? 너무 해. 난 여자야. 남자랑 다르다고... 여자들은 원래 체질상 심정상 자기 좋아하는 남자들한테 자기 몸을 다 주는 존재가 아니야. 여자들 유전자 DNA에 그런 게 박혀 있지. 그래서 여자는 모든 남자에게 자기 몸을 허락하지 않아. 쉽게 말해 임신하기 때문이야. 남자는 임신하지 않으니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기고 싶은 거지. 여자는 안그래. 임신이라는 리스크 관리를 해야 하는 존재야. 남자들은 아무 여자한테나 껄떡대며 여자의 몸을 차지하려는 본능과 습성이 있지만 여자는 안 그래. 여자는 임신할 수 있는 자기의 몸을 조심스럽게 사려야 해. 그래야 생존할 수 있어. 내 유전자도 잇게 할 수 있지.
나도 그런 건 상식적으로 알아. 그런데 너 아까 말하는 거 보니까 특별히 똑똑한 남자한테는 네 몸을 허락하지 않고 반대로 일반적 평범한 남자와만 섹스를 즐겼다고 했잖아. 그게 도저히 말이 안되. 여자는 본능적으로 똑똑한 남자를 택하게 되어 있거든. 그래야 임신해서 낳은 자식들한테 그런 유전자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지. 근데 넌 그런 여자들의 본능에 위반되게 덜 똑똑한 남자를 섹스 상대로 택했잖아. 그래서 너는 희한한 여자라는 거야. 아까 네가 죄를 지었으니 벌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사실 그 것까지는 아니네. 네 말을 듣다보니 너 때문에 괴로워하며 정신착란과 자살까지 겪은 남자들 편에서 말한 거 뿐이야. 네 말대로 너는 죄짓지 않았지만 이중적으로 행동했어. 그게 나쁜 거야. 죄는 아니라지만...
알겠어. 나로 인해 상처받으며 괴로움에 극단행동까지 한 남자들한테 너무 미안해. 나 살아생전에 내가 왜 그랬나 몰라. 나 다시 환생한다면 똑똑한 남자와 사랑하고 싶어. 그런 남자와 정신적 육체적 사랑을 모두 누리며 살고싶어. 난 똑똑한 남자와의 정신적 사랑과 평범한 남자와의 육체적 사랑을 이분화 시켜 살았어. 그럴 필요가 없었지. 괜한 나의 고집이었어. 허영적 똥고집이었어. 나의 고집이 남자들을 괴롭게 했던 거고. 남자들을 파멸로 이르게 했던 거고... 내 삶에 후회되며 반성하는 것들이 많아. 그런데 죽어서 그러면 뭐 하나. 될수록 이른 나이에 철들어야 하는데 나는 죽어서 철이 들었으니 한심한 거야. 보아하니 나처럼 너도 죽어서 철든 거 같은데. 죽어서 아무리 후회한들 뭔 소용이야. 아무 필요없어. 그런데 우리가 이승도 아니고 저승도 아닌 중간계같은 여기 지금 있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으니 뭔가 희망이나 절망이라도 있는 걸까? 내 심정을 짧은 글로 나타내고 싶어. 이렇게…
나는 요한의 목을 딴 악한 살로메의 환생이었어.
육감적 미모는 아니었지만 지성적 면모를 갖추었었지.
적당히 이뻤지만 지성미를 뿜어댔었던 팜프파탈 치명여인!
당대에 똑똑하다고 소문난 남자들은 나한테 환장했지.
나는 그 똑똑남들을 내 입 안의 혀처럼 가지고 놀았어.
여자는 자기 몸을 줄듯말듯해야 남자를 유혹한다지만
나는 아예 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고 나중에도 없었어.
남자들은 지 아무리 똑똑해도 여자한테 차이면
우는 아이가 돼서 울다가 울다가 미쳐 버리기도 하지.
무심하며 무정했던 난 남자들은 그냥 원래 그러려니 했지.
그리고 지혼자 똑똑한 척 다하며 뻐기며 살았지.
그렇더라도 내가 모든 남자들을 거부했던 건 아니야.
똑똑하지 않은 남자들과 프리섹스를 즐겼으니 나도 참!
그래도 내 인생에서 최고의 업적을 하나 꼽으라면!
내 몸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기에 미쳐간 남자가
오히려 그 정신착란으로 이룬 그의 철학적 사상이야.
내가 그를 미치게 했기에 그는 대단한 성취를 이루었지.
이성적 진리를 깨부순 그는 20세기 현대철학의 시조야.
내 업적은 아니지만 나는 그에게 광기적 영감을 준 거지
아마 나 아니었으면 그는 그냥 똑똑한 남자로 남았을 거야.
근데 그런데, 내가 지금 뭔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하는 거야.
한 남자를 그토록 치명적으로 망쳐놓곤 뭔 내 공치사야!
이런 말은 죽어서까지 똑똑한 그를 능욕하는 망언일지 몰라.
致
命
女
人
네가 지은 시인지 그냥 짧은 글인지 모르겠지만 들어보니 장자라는 자가 비유한 재미있는 의미있는 이야기가 떠오르는군. 나 이름대로 무식하지만 알만큼 알아. 어느 날 낚시를 하고 있는 장자한테 왕의 신하 둘이 찾아왔다지. 그들은 장자에게 이렇게 말했데. “우리 왕께서 장자, 당신을 최고관직의 재상 벼슬을 주고싶다고 하셔서 당신을 모시러 왔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지. “3000년 전 당신네 나라에 신령한 거북이가 있었는데 왕은 거북이를 죽인 후 박제하여 비단으로 감싸 신전 사당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지요. 여기서 하나 물읍시다. 당신들이 그 거북이라면 죽어서 예우 받기를 바라겠소? 아니면 살아서 흙탕물에 꼬리를 흔들며 기어 다니길 바라겠소?” 이에 두 신하는 이렇게 대답했다지. “죽어서 대우받을 바에야 살아서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겠소.” 이에 장자가 말했대. “돌아 가시오. 나도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며 살겠소.” 무식이 내가 지금 신희 네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겠어? 너 스스로 똑똑하다고 하니까 대충 알겠지.
나! 두뇌회전 빨라. 내가 뺀찌놓은 퇴짜놓은 그 남자가 죽어서 그렇게 20세기 현대철학의 아버지로 추앙되기보다는 차라리 살아서 나와 질퍽하게 사랑 나누며 살기를 바란다는 거네.
Exactly! 딱이야. 너 똘똘하구만. 머리가 휙휙 잘 돌아가네. 너에게 버림받은 그 작자도 죽어서 그 따위 허망한 영광을 누리기보다 살아서 해보고 싶은 거 다해보고 살고 싶었을 거야. 그러니 너 아까 지은 글 고쳐야겠어. 그리고 그에게 사랑주지 못한 너는 깊이 참회 반성 후회해야 해. 그런데 내가 너한테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 나는 살아서 나 하고싶은 거 다하고 살았는데 죽어서 온갖 오욕을 다 듣고 있어. 살았을 때 제대로 잘 살아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부러운 사람이 한 명있어. 바로 이 사람이야.
Sereste Khama 1921~1980, 보츠와나 초대 대통령
나랑 갑장(甲長)이야. 동갑(同甲)이지. 1921년 같은 해에 태어났어. 또 나랑 똑같이 1966년에 대통령이 되었지. 그는 1980년 췌장암으로 사망하여 대통령직을 물러났으니 14년 권좌에 있었고, 나는 1979년 쿠데타로 대통령 이후 된 황제에서 물러났으니 13년 권좌에 있었으니 거의 비슷한 기간동안 권력을 가졌었지. 이렇게 그와 나는 비슷한 점이 많아. 그런데 그의 정치와 나의 통치는 완전히 상반되. 그는 대통령이라는 권력을 제대로 잘 사용했어. 자기네 나라 국민들이 잘 살도록 했어. 다이아몬드 등 천연자원으로 벌어들이는 막대한 수입을 의료 교육 공공시설 등에 투자했지. 하지만 나는 나의 대통령-황제 권력을 나 잘먹고 잘사는 데 허비했지. 나는 우리나라를 제국이라 칭했고 나의 황제대관식에 엄청난 무지막지한 돈을 썼어. 여기 들어와 생각하니 왜 그랬나 몰라. 난 바보천치였어. 그의 나라는 지금 검은 대륙인 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야. 치안도 제법 좋은 나라지. 하지만 나의 나라는 아직도 가난한 나라야. 치안도 엉망이야. 이렇게 누가 다스리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 사이인 천양지차로 갈라지게 되지. 아!
살아서 좀 잘하지 그랬어. 여기서 후회하면 뭘해. 나도 참회하면 뭘해. 다만 환생한다면 나는 그 남자와 정신적으로는 물로 육체적으로도 사랑하고 싶어. 너는 환생한다면 어떻게 하고 싶어?
나는 살아서 나폴레옹을 가장 존경하며 헛된 짓을 하며 살았지만 지금 죽어서 동갑내기 그 친구를 가장 존경하게 되었지. 나도 그처럼 나 잘먹고 잘사는 게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치 통치를 하고 싶어. 환생한다면 잘 할 수 있을 거같은데…
그렇게 하는 게 쉽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그런 기특한 생각이라도 했다니 다행이다. 혹시 우리 환생할지 모르니까 그 마음 변치마. 어! 그런데 밖이 왜 이리 소란스러워. 전에도 여기서 다른 남자들과 얘기할 때도 그랬는데 또 그러네. 무식아! 좀 살펴봐.
<전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