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물권색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저곳의 다섯 공리公理 axiom>
1. 일찍 들어오고 늦게 들어오고 선후배 없이 다 똑같은 동등한 존재다. 존대말 없이 서로 말을 터도 된다.
2. 살아생전에 언제 어디서 살았던 다른 지역에 대해 대충은 안다. 시공간 초월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3. 이승에서의 집착을 다 비워 버려야 하지만 아직 미련이 있다. 물권색 욕망이 강한 인간의 관성 때문이다.
4. 한 방에서 이성끼리 대화하다 방이 바뀌며 이성 상대가 바뀐다. 덕분에 저곳에서의 생기가 은근히 살아난다.
5. 저곳에서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최종 정착지가 정해진다. 그러니 저곳은 중간 경유지가 된다.
43. 병구와 오미
나도 인간이었던지라 저 아래 세상을 산 사람인데
참으로 인간세상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희한한 데야.
오랑캐와 화친을 한 배신자라고 내 동상에 침을 뱉더니
이제는 오랑캐와 잘 지낸 선각자라고 나를 치켜 세우네.
참 나, 어이가 없네. 뭘 아신다고. 웃기는 년놈들이야.
내가 오랑캐와 화친한 덕분에 다들 평화롭게 잘들 살았지.
그런데 나 죽고 다른 오랑캐한테 당하자 분을 나한테 풀었어.
나랑 반대로 오랑캐와 싸우자고 주장했던 자는 영웅이 되었지.
인간세상에 진리와 정의라는 게 있는가 모르겠어.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그런 거 절대 없다고 생각해.
지들 맘대로 지들식 잣대로 진리와 정의를 조작해내지.
진리와 정의라는 건 그럴 듯한 허울에 불과해.
패자는 진리와 정의를 말할 자격이 안되.
승자가 진리와 정의를 말할 조건이 되지.
그래도 요즘 천년 만에 내 상태가 전환적으로 달라졌지.
나 살던 곳에서 막강한 승자가 나를 옹호했기 때문이야.
덕분에 내가 배신자에서 선각자로 바뀌었으니 난 좋을까?
근데 좋아할 수만도 없어. 그냥 이용당하는 걸 수도 있어.
난 그냥 여기서 조용히 편하게 명복을 누리고 싶어.
신원(伸冤)까지는 원하지도 않아. 그냥 날 내버려 둬.
正
義
造
作
귀가 컸던 내 아버지가 왕일 때도 나라 사정은 괜찮았지.
첫째 오빠, 둘째 오빠가 왕일 때도 그런대로 괜찮았어.
그런데! 여자인 내가 왕이 되고부터 나라가 어지러웠어.
도대체 왜 그랬겠어?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그랬을까?
내가 선대의 두 여왕들보다 능력이 딸린 건 맞을 거야.
그런데 나라가 어지러워진 근본이유는 아닐 거라고 판단해.
나라 망할 때가 되었을 때 내가 왕이 되었던 이유가 있겠지.
우리나라가 천년왕국이라는데 나는 그 말년에 왕이 되었어.
폭판 돌리기에서 나는 운없게 폭탄 터질 때 폭탄을 받은 거지.
또 여자인 내가 왕이 되었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어.
난 그냥 한 남자한테 사랑받으며 살아야 좋을 팔자였어.
나 여왕일 때 한 남자와 사랑할 때가 내 화양연화였어.
그 남자가 죽자 나는 망연자실하며 불행이 득달같이 몰려왔지.
전국에 지가 왕이라 자처하며 극심한 반란이 일어나는데
조정에 성골 진골 귀족들은 지들 잇속 챙기기에만 바빴어.
그러다 어느 똑똑한 사내가 개혁안을 올렸는데 맘에 들었어.
그대로 시행하라고 어명을 내렸건만 여왕의 명은 힘이 없었어.
그 사내는 홀연히 사라지고 나는 온갖 선전선동질에 시달렸어.
드센 놈들 등쌀에 나는 10년만에 하야 할 수 밖에 없었어.
심신이 쇠약해진 나는 1년을 시름시름 앓다 33세에 죽고 말아.
지금 세상사람들은 날 섹스에 탐닉한 색녀로나 알고 있지.
나는 여왕 자리에 맞지 않는 가련한 여왕이었을 뿐이야.
내가 생각해도 불쌍한 나를 그냥 불쌍하게만 봐주면 좋겠어.
可
憐
女
王
<전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