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물권색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저곳의 다섯 공리公理 axiom>
1. 일찍 들어오고 늦게 들어오고 선후배 없이 다 똑같은 동등한 존재다. 존대말 없이 서로 말을 터도 된다.
2. 살아생전에 언제 어디서 살았던 다른 지역에 대해 대충은 안다. 시공간 초월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3. 이승에서의 집착을 다 비워 버려야 하지만 아직 미련이 있다. 물권색 욕망이 강한 인간의 관성 때문이다.
4. 한 방에서 이성끼리 대화하다 방이 바뀌며 이성 상대가 바뀐다. 덕분에 저곳에서의 생기가 은근히 살아난다.
5. 저곳에서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최종 정착지가 정해진다. 그러니 저곳은 중간 경유지가 된다.
44. 정재와 미호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이런 근사한 노래가 있지.
내가 먼저 너한테 하고픈 말이 딱 이 노래 제목같아.
그 곡에선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아련한 과거가 떠오른다지만
난 좀 다른 차원에서 누구라도 그러했었을 나의 과거가 올라.
누구라도 나같은 과거가 있었다면
누구라도 나같은 처지에 있었다면
누구라도 나처럼 행동했을 꺼야.
나의 양아버지는 나를 후계로 세우려다가
갑자기 친아들이 생기자 나를 버리셨지.
그래도 나는 천만다행인 편이야.
나처럼 내 양아버지의 양아들이었던 내 형은
본인은 물론 일가친척 삼족이 처단되어 소멸당했어.
자신의 후계권력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잔혹함이었지.
그 때 나는 너무 어렸는지 나한테까지 그러시진 않았지.
열여섯 소년일 때 양아버지는 나한테 중책을 맡기셨지
바다 건너 조선정벌 원정군 총대장으로 활약하기도 했어.
그런데 양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우린 퇴각했어.
8년간 끈 전쟁에서 우리가 퇴각했으니 우리가 진 싸움이었어.
이후 양아버지 후손들 편과 반대편 사이에 벌어진 전투에서
나는 아주 결정적 순간에 양아버지 편을 배신했어.
그래서 배신자 소리를 듣는데 누구라도 그리 배신했을 거야.
그래도 최악죄가 배신죄라 죗갑이 가장 크다는데 넘 무서워.
最
惡
背
信
이 세상에 나만큼 남자복 많은 여자가 또 있었을까?
하녀에서 포로로, 포로에서 창녀로, 창녀에서 공작부인으로, 공작부인에서 황제의 정부로, 황제의 정부에서 황후로, 황후에서 황제까지 된 나는 숱한 남자들을 다 누렸어. 남자복이 많았지.
공식적으로 내 마지막 남자였던 황제는 날 황후로 만들었어.
그러다 내가 궁실에서 어느 잘 생긴 귀족과 밀애를 즐겼지.
내 내연남은 나와의 불륜사실이 들통나자 즉각 참수되었어.
무시무시했던 황제는 황후 마누라인 나를 죽이지 않았지.
나한텐 불같은 성격의 남자를 안정시키는 재능이 있었으니까.
남편인 황제가 죽자 나는 제국 최초의 여황제가 되었어.
그런데 나는 그냥 어찌어찌해서 추대된 여제였을 뿐이야.
난 권력을 다루는 능력도 기술도 의지도 노력도 없었어.
여제가 되니 남자 마음을 안정시키는 재능은 필요 없었어.
남자 신하들을 단호하게 모질게 질기게 다루지 못했지.
그냥 밑에서 하라는 대로 공식일정을 치루는 게 일이었지.
그러다 아주 추운 날씨에 야외에서 무슨 행사를 하다가
그만 지독한 감기에 걸려 황제가 된지 2년만에 죽게되지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권력에 무능했던 나와 달리
내가 죽고나서 좀 있다 거의 여인천하가 열리게 되지.
난 첫 번째 여제이고 내 조카뻘인 애가 두 번째 여제야.
내 셋째 딸이 세 번째 여제가 되는데 나보단 권력을 알았어.
평생 결혼을 안했다지만 애인들이 많았다고 하더군.
그리고 나랑 피는 안섞였지만 내 이름을 그대로 이은
미호2세가 황제 남편을 몰아내고 네 번째 여제가 되.
얘는 여자지만 대제로 불리는데 권력에 유능한 여자였지.
權
力
無
能
<전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