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67)- 무명의 낚시꾼에게서도 깨달음을 얻은 약천 남구만

숙종대 영의정 세 차례 역임할 정도로 합리적인 정치인
83세 장수한 만큼 지방관과 중앙관직 골고루 거친 관력
서인이지만 남인들도 지지할 만큼 온건적이고 지혜로워

조해훈1 승인 2021.03.19 20:52 | 최종 수정 2021.03.22 14:10 의견 0

우리가 중고교 시절에 배운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는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 지었다. 위 작품은 영의정이었던 그가 1689년(숙종 15) 장희빈을 책봉하는 일에 반대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강릉으로 유배 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구만은 정파싸움이 심했던 숙종대에 영의정을 세 차례나 지낼 정도로 합리적인 정치인이자 문장가였다.

보물 제1485호인 약천 남구만 초상. 출처=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485호인 약천 남구만 초상.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그는 1629년(인조 7)에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1711년(숙종 37)에 83세로 세상을 버렸다. 당시로서는 아주 장수하였다. 그는 수(壽)를 누렸고, 그에 못지않게 관력(官歷) 또한 화려하다. 28세인 1663년(효종 7)에 문과에 급제해 효종·현종·숙종 3대에 걸쳐 관료생활을 했다. 그가 지낸 주요 관직만 보자면 다음과 같다.

전라도관찰사·경상도 암행어사·함경도관찰사 등에서 주요 지방관을 지냈다. 중앙관직으로는 이조·예조·병조·형조와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수장, 한성좌윤, 승지, 그리고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역임했다. 남구만만큼 거의 모든 분야의 관직을 두루 거친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는 이처럼 주요 관직만 많이 역임한 게 아니라 그만큼 국정 전반에 걸쳐 수많은 개선 방안을 제기하기도 했다. 남구만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행정 운용에 있어 지혜로웠는지를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그가 병조참판 시절 이서(吏胥)들이 횡령을 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민을 하다 이서들에게 징계를 하지 않고 교화하는 차원에서 축낸 것을 몰래 물어내게 했다. 그러자 이서들이 갖다놓은 것으로 창고가 가득 찼으며, 두 번 다시 횡령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그는 즉각 법을 집행하기보다는 보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함으로써 훗날 많은 사람들에게 현명한 판단이었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당파로는 서인(西人)이었던 그에겐 또 다른 일화가 있다. 1669년(현종 10) 파직되어 낙향해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낚시를 하게 되었다. 낚시에 서투른 그에게 물고기가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낚시꾼이 다가와 낚싯대를 넘겨받더니만 쉼 없이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닌가. 남구만이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낚시꾼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남구만의 문집인 『약천집(藥泉集)』 28권, 「낚시에 대한 글(釣說)」에 관련 내용이 실려 있다.

남구만의 문집인 『약천집(藥泉集)』.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구만의 문집인 『약천집(藥泉集)』.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법(法)은 가르칠 수 있지만 묘(妙)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가르칠 수 있다면 묘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 공께서 제 방법을 따라 아침저녁으로 낚싯대를 드리우고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여러 달을 익히고 또 익혀서 터득한다면 손이 적절하게 나가고 마음이 저절로 움직일 것입니다. … 공께서 하시기에 달린 것이지, 저는 어떻게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남구만은 단지 고기를 잘 낚는 방법만을 배운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를 하나 더 깨달았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이치 내지는 도(道)가 있다는 것이다. 이치를 깨우치는 방법은 많지만 그것에 도달하려는 정성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다 정신과 요령이라는 ‘묘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이치는 비단 낚시에만 있는 게 아니라 자신 같은 정치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는 언제나 이처럼 합리적이고 현실성 있는 정첵 대안을 제시해 송준길의 문하인 서인계였지만 남인 집권기에도 형조참판, 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하였다. 남인계 영의정 허적이 그를 지지할 정도였다. 하지만 숙종 초에 허적의 서자 허견과 윤휴의 비리를 공격한 일 때문에 거제도로 유배를 갔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초부리의 남구만 묘 인근에 있는 그의 시조작품 '동창이 밝았느냐' 시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초부리의 남구만 묘 인근에 있는 그의 시조작품 '동창이 밝았느냐' 시비.

서인 중에서도 소론에 속했던 그는 온건주의자였다. 그 예를 한 번 보겠다. 갑술환국(1694·숙종 20) 직후 희빈 장씨의 동생인 장희재의 처리를 두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을 했다. 당시 장희재는 복위한 중전인 인현왕후를 모해했다는 혐의로 극형을 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소론 일부에서도 그 처벌에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남구만은 장희재를 극형에 처하면 세자가 불안해 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러자 노론은 남구만이 남인이 다시 집권할 것에 대비해 포석을 두는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는 이후에도 권대운을 비롯한 남인 일부의 신원을 추진했고, 이현일 같은 남인 산림에 대한 가혹한 처벌에도 반대했다. 그러니까 정파적 이익을 떠나 일관된 원칙과 상황에 따른 합리적인 묘를 발휘하자고 한 것이다.

하지만 정치란 원칙과 합리성만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장희재와 희빈 장씨가 사형, 사사되었고, 남인들은 정계 등용이 거의 막히고 말았다. 숙종 말년에는 노론정권이 성립되고, 소론은 정계에서 축출되었다. 남구만은 이 무렵 세상을 버렸지만 그의 정치적 노선을 계승한 최석정조차 자신의 저술을 소각당할 만큼 숙종 말년기의 상황은 엄중했다. 숙종 시기의 정치적 대립 상황은 현재의 정치적 상황과 유사성이 많지만 여기서는 언급을 하지 않겠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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