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6년 2월 용재(容齋) 이행(李荇·1478~1534)은 유배지인 거제도에 도착하였다. 그는 고절령(高絶嶺) 아래에서 가시나무를 둘러치고 갇혀 살아야 하는 위리안치의 형을 받았다. 탱자나무로 가두었을 뿐만 아니라 병졸들이 지키고 서 있기까지 하였다. 당시에 그가 읊은 시에 그러한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가시나무로 사방을 두르니 배 안에 있는 듯한데(芧茨四面僅如船)/ 탱자나무로 거듭 에워싸 하늘도 보이지 않는구나(枳棘重圍不見天) …”(「그냥 시를 짓다(卽事)」, 『용재집』)
그러면 이행이 누구이며, 그는 얼마나 큰 죄를 지어 그러한 형벌을 감당해야 했을까? 이행의 본관은 덕수이며, 지돈녕부사 이명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온양군사 이추이고, 아버지는 판의금부사를 지낸 이의무이다. 그는 1495년(연산군 1)에 치러진 증광 문과에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예문관 검열·봉교, 성균관전적을 역임하고,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할 정도로 엘리트였다. 1500년 하성절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홍문관수찬를 거쳐 홍문관교리까지 올랐다.
그러다 이행은 1504년 4월 사헌부 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시호 추승을 반대했다는 죄목으로 권달수 등과 함께 하옥되어 곤장 60대를 맞고 충주로 유배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6월 15일 가장 절친하였던 벗 박은(朴誾)이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효수 당하였다. 충주에 유배되어 있던 그는 박은과 친하였다는 이유로 한양으로 소환되어 곤장 200대를 맞았다. 그러다 9월 들어 다시 곤장 100대를 더 맞았다. 이때 이행은 폐비 시호 추승을 가장 먼저 반대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참형에 처해질 참이었으나 벗 권달수가 창의한 사람은 자신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권달수가 이행을 살리고 대신 참형을 당하였다.
추운 12월에 이행은 이번에는 경남 함안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신분도 노비로 전락했다. 1505년 1월에 유배지 함안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유배를 살다가 다시 같은 해 8월에 서울로 압송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아 목숨이 끊어질 지경이었다. 겨우 살아났지만 이번에는 이듬해인 1506년(연산군 12) 1월 다시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그리하여 1506년 2월에 유배지 거제도에 도착한 것이다. 이행과 가장 절친한 벗 박은과 권달수는 불귀의 객이 되었지만, 다행히도 홍언충·홍언필·최숙생·김세필 등은 거제도와 가까운 유자도에 유배되었다. 이들 외에도 홍귀달의 아들이자 홍언충의 형제인 홍언승·홍언방·홍언국, 이극균의 당질 이세정·이세홍과 종손 이수훈·이수간·이수위·이수건·이수공·이수심·이수성, 그밖에 이려·이맹전 등 많은 인물들이 이 무렵 거제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당시 많은 관료들이 연산군의 잘못을 논하다 제주도와 거제도, 진도로 나누어 유배되었던 것이다.
이행은 이들 벗과 시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차츰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그는 특히 최숙생, 김세필과 절친하게 지냈다. 이행과 최숙생은 위리안치되어 있었기에 처소를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가끔 찾아오면 함께 시를 짓기도 하며 놀았다. 이에 이행은 벗들과의 우정을 위안으로 삼으면서 차츰 거제도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이행은 집 주변에 대나무와 창포, 국화를 심었다. 이제 틈이 나면 좁은 집에서 나와 개울에서 노닐었다. 이해 7월에 드디어 자신의 거처 일대를 유배지가 아닌 은거지로 바꾸었다. 즉 유배의 땅을 은자의 땅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행이 살던 곳은 거제도 관아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고절령 아래다.
원래 이 고개이름이 고자고개였다고 한다. 예전에 고을에 역(役)을 밭은 백성이 있었는데, 역이 과중하고 길이 험하여 마침내 자신의 성기를 잘라버렸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했다. 이행은 이 이름이 비루하다 하여 자신의 절조를 드러내기 위해 고절령으로 바꾸었다. 또 골짜기 이름을 소요동이라 하여 은자가 거니는 곳으로 삼았다. 그 뒤로 이행은 벗들을 소요동으로 불러 자주 시회를 열었다.
이해 9월 2일 중종반정이 일어나 성공하고, 연산군은 교동도로 유배되었다. 이행은 다시 서울로 압송될 무렵 중종반정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드디어 9월 10일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행은 9월 20일 홍문관 교리로 조정에 복귀하였다. 그로부터 30여 년간 이행은 조정에서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21년 공조판서가 된 이후 우참찬·좌참찬·우찬성으로 승진하고, 152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다시 좌찬성을 거쳐 1527년 우의정에 올라 홍문관대제학 등을 겸임하였다. 1530년 『동국여지승람』의 신증(新增)을 책임 맡아 끝내고 좌의정이 되었다.
그는 남곤과 편을 이루어 조광조를 공박하여 사림의 적이 되었고, 실각하여 유배되어 있던 김안로를 벗으로 여겨 그를 조정으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1532년 김안로 문제로 도리어 평안도 함종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두 해 동안 유배지에서 병으로 고생하다가 57세에 생을 마쳤다. 그의 생애 자체가 시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반대하였던 사림이 정국을 장악한 까닭에 그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그러나 이행이 가장 절친했던 박은과 함께 16세기 초반을 빛낸 가장 뛰어난 시인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허균이 이행의 시를 가장 아낀다며, 우리나라 제일의 시인으로 손꼽힐 만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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