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시기와 그 이후 광해군과 인조 때는 그야말로 격변기였다. 이 시기 세 왕조에 걸쳐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한 인물이 있다. 그리고 그는 당시로서는 아주 드물게 87세로 장수까지 하였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중요한 사건들의 중심에 서 있었다.
현재도 5년 임기의 한 정권에서 영의정격인 총리가 두세 번 바뀐다. 하물며 재위 기간이 길었던 조선시대였으니 그는 보통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처세의 달인이었을까? 아니면 남들이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능력이 뛰어났을까? 남인의 거두이자 이원익의 손서(孫壻·손녀사위)였던 허묵(許穆)이 그의 문집인 『오리집(梧里集)』을 간행하고 묘비명과 연보, 유사(遺事) 등을 지어 업적을 기렸다. 이 문집의 내용 등을 참조하여 이원익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보겠다.
이원익은 명종 2년에 태어나 인조 12년에 졸했다. 15세에 동학(東學·4학 중의 하나)에 들어가 수학해 18세인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23세인 1569년(선조 2)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사람과 번잡하게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외출도 잘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서애 유성룡과 율곡 이이가 일찍부터 이원익의 비범함과 능력을 알아차렸다.
여러 벼슬을 거쳐 1587년 황해도 안주목사에 기용되어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황해도관찰사에게 양곡 1만여 석을 달라고 해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호하고 종곡(種穀)을 나누어주어 생업을 안정시켰다.
또, 병졸들의 훈련 근무도 일 년에 4차례 입번(入番)하던 제도를 6번제로 고쳐 시행하였다. 이는 군병을 넷으로 나누어 1년에 3개월씩 근무하게 하던 것을 1년에 2개월씩으로 고쳐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킨 것이다. 이 6번 입번제도는 그 뒤 순찰사 윤두수의 건의로 전국적인 병제로 정해졌다.
그리고 뽕을 심어 누에 칠 줄을 몰랐던 안주 지방에 이원익이 권장해 심어 백성들로부터 ‘이공상’(李公桑·이원익에 의해 계발된 누에와 뽕이라는 뜻)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선조수정실록』(선조 20년 4월 1일)은 “그가 근면하고 민첩하고 청렴하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사모해 치적이 크게 나타났다. 자주 포상을 받아 승진해 조정으로 돌아왔다. 재상이 될 것이라는 명망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 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조판서로서 평안도순찰사의 직무를 띠고 먼저 평안도로 향했고, 선조도 평양으로 파천했으나 평양마저 위태롭자 영변으로 옮겼다. 평양이 함락되자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고,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왜병 토벌에 전공을 세웠다. 1593년 정월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해 평양을 탈환한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되었고, 1595년 우의정 겸 4도체찰사로 임명되었으며, 그 뒤 명나라에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로 다녀왔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이원익은 이순신(李舜臣)을 변함없이 옹호한 거의 유일한 대신이었다. 유성룡마저 이순신을 비판할 때도 이원익은 “경상도의 많은 장수들 중에서 이순신이 가장 뛰어나다”면서 그를 교체하면 모든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선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선조 29년 10월 5일, 11월 7일).
정유재란 이후 이원익은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영의정(1599년)에 제수되었다. 처음 영의정에 임명된 것이다.
당시 이이첨 일당이 유성룡을 공격해 내몰림을 당하자 이원익은 상소하고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 뒤 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가 그 해 9월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두 번째 영의정 자리였다.
이 때 정영국과 채겸길이 홍여순·임국로를 두둔하면서 조정 대신을 공격하자 당파의 폐해로 여기고 이의 근절을 요구했고, 또 선조의 양위(讓位)를 극력 반대하고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선대의 재상이었던 그를 다시 영의정에 임명했다. 세 번째 영의정에 임명된 것이다. 그는 임명되자마자 전쟁 복구와 민생 안정책으로 국민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호조참의 한백겸이 건의한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지방에 한해 실시해 토지 1결(結)당 16두(斗)의 쌀을 공세(貢稅)로 바치도록 하였다.
그러다 광해군이 차츰 난폭해지자 임해군(臨海君)의 처형에 극력 반대하다 실현되지 못하자 1609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하지만 2년 뒤인 1611년 9월 광해군은 그를 다시 영의정으로 불렀다. 네 번째 영의정에 임명됐다. 그러나 이때도 국왕의 시책에 반대해 이듬해 4월에 체직(遞職·벼슬이 갈림)되고 말았다.
그 뒤 대비폐위론이 나오자 극렬한 어구로 상소해 강원도 홍천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경기도 여주로 이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즉위하자 가장 먼저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불렀다. 다섯 번째 영의정 자리였다. 당시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인조에게 자신이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지냈으니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면 자신도 떠나야 한다는 말로 설복해 광해군의 목숨을 구했다.
1624년에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이원익은 80세에 가까운 노구로 공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세자를 호위해 전주로 갔다가 강화도로 와서 왕을 호위했으며, 서울로 환도하자 훈련도감제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고령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낙향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는 성품이 소박하여 과장이나 과시할 줄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이원익은 뛰어난 실무적 경륜과 굳은 의지로 난국을 헤쳐나간 인물이었다. 경륜과 인품이 겸비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었던 자리였다. 생전이나 사후에도 탁월한 실무적 식견과 강직한 원칙으로 일관한 그의 삶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청빈하였으므로, 벼슬에서 완전히 물러난 뒤에는 조석거리를 걱정할 정도였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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