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 (74) - 세종 시대에 어떻게 그 많은 책을 편찬하였을까?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왕좌 오름
어릴 적부터 독서가 방대한 출판 완성
22개 분야 360종, 그중 훈민정음 으뜸

조해훈1 승인 2021.07.16 13:36 | 최종 수정 2021.07.18 12:02 의견 0

세종(1397~1450)은 알다시피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조선의 제4대 왕이다. 세종시대는 다른 왕들의 시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출판문화가 융성했다. 세종시대에 출판한 책은 22개 분야에 걸쳐 무려 360종이나 되었다.

그러면 ‘세종은 어떻게 그 많은 책을 출판하게 되었을까?’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세종의 ‘호학(好學)’ 등을 연계해 풀어나가야 할 것 같다.

그가 셋째 아들이었으므로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태종이 누구던가? 그는 일찍부터 내심 셋째 아들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1418년 6월에 태종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라며, 세자로 책봉하였다. 충녕대군이 훗날 세종이다. 맏형은 양녕대군, 둘째 형은 효령대군이었다.

백성들을 위한 윤리 그림책인 '삼강행실도'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성들을 위한 윤리 그림책인 '삼강행실도'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녕대군(1394~1462)은 1404년(태종 4) 왕세자로 책봉되었지만 성격이 자유분방하였다.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범절이라든가, 딱딱한 유교적인 교육이나 엄격한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궁중을 벗어나서 사냥을 하는 등의 자유분방한 풍류 생활을 더 즐겼다. 그리하여 결국 1418년에 세자에서 폐위되고 말았다.

효령대군 1396~1486)은 동생 충녕이 세자로 책봉되자 정치에서 한 발 물러서 불교에 깊이 심취하였다. 1435년 회암사 중수를 건의했고, 1464년 원각사를 창건하게 되자 공사를 친히 감독했고, 『원각경(圓覺經)』을 국역하여 간행하였다.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선위를 이어받아 세자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이 사람이 바로 세종이다.

세종은 태종의 정치체제를 이어받아 선친이 이룩한 왕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소신 있는 정치를 추진할 수 있었다. 세종대는 개국공신 세력은 이제 사라지고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관료와 유자(儒子)의 소양을 지닌 국왕이 서로 만나 유교정치를 펼 수 있었던 시기였다.

세종은 집현전을 통해 많은 학자를 양성하였다. 그 학자들이 세종을 뒷받침해 수많은 편찬사업과 유교적 의례·제도를 정리하여 유교정치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세종이 펴낸 출판물 중 가장 으뜸인 '훈민정음'.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종이 펴낸 출판물 중 가장 으뜸인 '훈민정음'.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집현전은 중국과 고려시대에도 있었고, 조선 초 정종 대에도 설치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집현전이라고 하면 조선시대의 세종 2년 3월에 설치한 것을 의미한다.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하게 된 목적은 조선이 표방한 유교정치와 대명(對明) 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에 있었다.

세종 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이 행해졌다. 이 사업을 통해 문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정리가 이루어졌고, 정치·제도의 기틀이 잡혀갔다. 이 사업의 주도자는 물론 세종이었고, 이 일을 담당한 것은 집현전과 여기에 소속된 학자들이었다.

편찬물을 내용별로 분류하면 역사서, 유교경서, 유교윤리와 의례, 중국의 법률 및 문학서, 정치귀감서, 훈민정음·음운·언역(諺譯) 관계서, 지리서, 천문·역수서, 농서 등으로 다양하고 방대하였다.

세종대의 주요 편찬서 몇 종류만 보겠다. 유교윤리와 의례서인 『효행록(孝行錄)』, 농서인 『농사직설(農事直說)』, 유교윤리와 의례서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지리서인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의약서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천문서인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 조선개국찬가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역사서인 『高麗史』 등이다. 뭐라 해도 세종 28년에 펴낸 『훈민정음』이 대표적인 출판물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세종은 집현전을 통해 길러 낸 최항·박팽년·신숙주·성삼문·이선로·이개 등 소장 학자들의 협력을 받아 한자가 아닌 우리 민족의 문자를 창제한 것이다.

이러한 많은 편찬사업이 세종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고, 그 자신도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그 예로서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의 편찬은 집현전의 학자뿐 아니라, 53인이나 되는 거의 모든 학자들이 총동원되어 3년에 걸쳐 이룩한 큰 사업이었다.

광화문 앞에 있는 세종대왕 상. [출처=서울시]
광화문 앞에 있는 세종대왕 상. [출처=서울시]

또한, 종래 춘추관·충주에 있었던 사고(史庫)에 성주·전주 두 사고를 추가 설치하게 하였다. 그 덕분에 임란 중 전주사고본이 전화를 면하고 오늘날 조선 전기의 실록이 전해질 수 있었다.

그러면 세종이 그 많은 책을 출판하게 된 동인(動因)이 무엇일까? 부왕 태종은 종종 세종을 가리켜 ‘호학불권(好學不倦)’이라고 했다. 즉 어려서부터 책 읽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한 번도 싫증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종실록』 20년 3월 19일자에 세종이 한 말이 기록돼 있다. “책을 보는 중에 그로 말미암아 생각이 떠올라 나랏일에 시행한 것이 많았다.”라는 것이다.

자, 그러면 정리를 해보자. 세종은 어릴 적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독서편력은 넓었다. 왕좌에 오른 뒤에도 그는 계속 독서를 하였다. 어느 한 분야의 책을 읽다가 “아, 저런 내용의 책을 만들면 백성들에게도 도움이 되겠고,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데도 큰 보탬이 되겠다”라고 연상이 되었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과 이를 의논하여 실행에 옮겼다. 위 실록의 내용이 그런 사실을 단적으로 밝힌 것이다.

세종은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는 것(人君之職 代天理物)’이라고 믿었다. 하늘(곧 자연)의 질서 및 백성들에게 간절히 필요한 부분을 면밀히 관찰하되, 거기서 발견한 지식과 정보를 나라 다스리는 데 활용했던 것이다. 세종에게 책은 ‘그의 존재 자체’였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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