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든 언덕에 가녀린 풀 정말 고운데(陽坡細草正菲菲·양파세초정비비)/ 약초 넝쿨 푸성귀 싹이 비를 맞아 살져 있네.(藥蔓蔬芽得雨肥·약만소아득우비)/ 나물 캐는 계집아이 노랫가락 퍼지는데(挑菜小鬢歌踏踏·도채소빈가답답)/ 꽃에 노니는 나비가 함께 나풀나풀거리네.(弄芳遊蝶共飛飛·롱방유접공비비)/ 들꽃을 머리에 꽂고 구름 뚫고 다니다가(山花揷髻穿雲去·산화삽계천운거)/ 이슬에 옷이 촉촉한 황혼녘에 돌아오네.(行露沾衣帶晩歸·행로점의대만귀)/ 홀연 새들이 그윽이 서로 지저귀는 것을 보고(忽見幽禽相對語·홀견유금상대어)/ 고향 향해 머리 돌리니 그리움이 가물가물 참을 수 없네.(不禁回首思依依·불금회수사의의)
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1422~1484)의 시 「양번으로 가는 길에 나물 캐는 처자를 보고(陽樊焚途中挑菜女)」로, 그의 문집인 『삼탄집(三灘集)』 권8에 수록돼 있다. 이종묵 교수의 번역을 참조했다.
이승소는 조선 전기 세조와 성종 시기에 이조판서·형조판서·좌참찬 등을 역임했지만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세 번의 과거시험에서 모두 장원을 한 인재이며, 신숙주·강희맹 등과 함께 『국조오례의』를 편찬하는 등 조선 전기에 많은 활동을 한 문신이어서 그의 삶을 한 번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란 생각에서 살펴본다. 『국조오례의』는 조선시대 오례의 예법과 절차에 관하여 기록한 책으로 세종 때 시작되어 1474년(성종 5) 완성되었다.
이승소는 59세 때인 1480년 주문사(奏聞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때 양번(陽樊)이라는 곳을 지나면서 위 시를 지었다. 이국인 명나라였지만 봄이 되니 들판은 고운 풀이 돋아나고 약초와 나물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풀을 뜯으며 노래하고 다니노라니 나비가 동무가 된다. 이름 모를 산새가 말을 걸어온다. 문든 고향 생각이 난다. 고향에 두고 온 사람들도 그립다. 이처럼 이승소는 낯선 이국땅에서 고향의 봄을 떠올렸다. 그만큼 중국의 봄이 고향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승소는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으로 노비 6구, 전지 40결을 받았다. 하지만 주문사의 정사였던 한명회의 사헌궁각사건(私獻弓角事件)에 연루되어 간관의 탄핵을 받았다. 이듬해인 1481년에는 정헌대부에 올라 이조와 형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좌참찬이 되었으며, 1483년(성종 14)에는 신병으로 사직소를 올리자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이승소는 그 전인 38세 때인 1459년(세조 5)에도 사은사(謝恩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형조와 호조의 참의를 거친 이후였다.
명나라에 두 차례나 부사로 다녀왔다는 사실은 그가 아주 뛰어난 엘리트 문신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당시 사신은 명나라 황제나 대신들을 접할 때 사신으로서 온 목적 등 기본적인 보고를 해야 하지만 갑작스런 질문 등에도 논리적으로 두 나라 간에 원만한 상황이 유지되도록 말을 해야 하는 등의 임기응변적인 갖추어야 했다. 또 명나라 대신들과 수창(酬唱) 등도 해야 하므로 시도 잘 지어야 했다. 이승소는 당대에 이러한 실력을 다 갖추었으므로 두 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것이다.
그러면 이승소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자. 그는 본관이 양성(陽城)으로 고려조 시중 이춘부(李春富)의 현손이며, 이옥(李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사근(李思謹)이며, 아버지는 병조판서 이온(李蒕)이며, 어머니는 이회(李薈)의 딸이다.
1438년(세종 20) 17세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1447년(세종 29)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삼장(三場)에 연이어 장원했다. 3년마다 치르는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는 것은 그만큼 뛰어난 두뇌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는 이어 집현전의 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알다시피 조선 최고의 싱크탱크인 집현전은 세종 때 궁중에 설치한 학문 연구 기관이다. 고려 시대에도 있었지만 이름뿐이었고, 1420년에 세종이 실질적인 학문 연구 기관으로 만들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고, 여러 가지 책을 만들어 내는 등 세종 때의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집현전을 설치하게 된 목적은 조선이 표방한 유교정치와 대명(對明) 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에 있었다. 이에 따라, 집현전에서 유망한 소장학자들을 채용해 여러 가지 특전을 주었다.
집현전은 세종 2년(1420년)에 확대하여 실제의 연구기관으로 개편되어서 세조 2년(1456년) 폐지될 때까지 37년간 운용되었으며, 그 사이에 집현전에 근무했던 학사와 관원은 100명을 넘어섰다. 이들은 사실상 조선 전기의 학문과 정치를 이끌어가는 주역이 되었고, 세종 치세의 초석이 되었다. 이 집현전이 있었기에 세종 시기에 무려 22개 분야에 360종이나 되는 출판물을 간행할 수 있었다.
이승소는 조금만 더 일찍 출생했더라면 세종을 도와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조가 즉위하자 그는 집현전의 직제학으로서 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458년 예조참의가 되어 『초학자회언해본(初學字會諺解本)』을 찬정하였다. 1467년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병을 얻어 위중하자 국왕이 의약을 내렸다. 예종이 즉위하자 예조참판이 되어 명나라와의 외교 사무를 잘 처리하였다. 1471년(성종 2) 순성좌리공신 4등에 책록되고, 양성군(陽城君)으로 봉해졌다. 이어 예조판서가 되어 지경연사로서 경연 활동을 크게 일으켰다.
이승소는 문장이 뛰어났다. 저서로는 15권 6책의 시문집인 『삼탄집』이 있다. 외손 이수동이 1514년(중종 9) 함흥에서 목활자로 간행한 함흥 판본(6권 2책)과 1535년(중종 30)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청주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청주 판본(15권 6책)이 있다. 이승소의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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