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1664~1732)는 25세 되던 해에 부친인 박천(博泉) 이옥(李沃)에게 「상정하품폐거서」, 즉 과거를 포기하는 글을 올렸다. 부친은 허락하였다. 이에 이만부는 관계 진출을 포기하고 어릴 때부터 꿈꾸었던 성리학 공부와 저술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이만부의 할아버지 근곡 이관징은 문과에 장원급제해 대사성과 대사헌, 이조판서를 지내고 판중추부사에 올랐고, 부친 역시 문과에 급제해 이조참판과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의 집안은 그의 가까운 친척만하더라도 대과 급제자가 19명, 그 외 급제자가 50여명에 달했다. 그의 가계는 근기남인(近畿南人)의 명문이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지봉 이수광의 증손녀였다. 이만부는 이수광의 외손자인 셈이다.
그런 대단한 집안의 자식인 이만부가 왜 과거를 포기할 생각을 하였을까? 이만부가 살았던 시대는 조선 전대를 걸쳐서 가장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때였다. 아마도 그의 집안이 당쟁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은 게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효종이 북벌의 꿈을 실현 시키지 못하고 10년 만에 세상을 버리자 그의 아들 현종이 즉위했다. 현종 즉위 초에는 허목·윤휴·윤선도 등 남인이 효종의 계모 조대비의 복상문제를 들고 나와 서인들을 맹렬히 공격했으나 도리어 서인들의 주장이 채택돼 남인들은 실각했다. 이 시기 이만부의 할아버지 이관징은 1660년(현종 1) 1차 복상문제 때 쫓겨난 남인 허적 등을 구제하려다가 전라도 도사(都事)로 좌천됐다.
부친 이옥은 숙종 때의 2차 예송에서 우암 송시열의 처벌 문제를 놓고 영의정 허적과 대립하게 되고, 이것이 시비가 돼 당시 숙종의 외척이었던 김석주의 모함을 받아 평안북도 선천으로 귀양을 갔다. 이때가 숙종 5년(1678), 이만부의 나이 15세 때이다. 이로부터 남인이 권력을 잡은 기사환국으로 유배지에서 풀려나기까지 12년간을 북청·회령·곡성·정주·가산 등으로 옮겨가며 유배생활을 했다.
이만부는 부친의 귀양지를 직접 따라가 그곳에서 아버지를 모시면서 학문에 몰두하였으며, 이때부터 산행을 시작하여 국토의 서북지방을 모두 답보했다. 19세에 의성 김씨와 결혼했으며, 부친이 유배지에서 풀려났을 때 이만부는 25세였다.
숙종시대에 치열하게 전개되던 당파싸움, 그 이후에 남인에게 불어 닥친 잔인한 상황을 직접 목도한 그는 누구보다도 당쟁의 아픔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관료의 길이 어떤 것인지 부친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깊이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부친에게 관료의 길을 포기하고 학자의 길을 가겠노라고 선언(?)할 무렵 그는 가학을 통해 주자학의 기초를 갖추었으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가치관이 성립된 시기였다.
그는 이 무렵부터 영남을 유람하며 서애 유성룡의 사당을 알현하고, 해동도학의 조종으로 불리는 한원당 김굉필이 모셔져 있는 도동서원과 팔현서원에서 독서도 하였다. 그는 이 시기에 첫 부인과 사별하고 이듬해 서애의 후손 풍산 류씨와 결혼했다.
드디어 그의 나이 34세 때 경상도 상주에 있는 외답 노곡(논실)의 식산 아래에 터를 잡고 이거하였다. 식산의 호는 바로 이 산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상주에는 그의 고조부 이심(李襑)이 광해군 폐모사건 때 문경의 화음산 아래에 은거하였고, 그의 증조부는 상주 송치에 우거하였다. 그의 부친을 비롯한 여러 연줄이 있었으며, 그렇게 낯선 곳은 아니었다.
상주에 거주한 지 1년 후에 부친상을 당하여 서울로 올라가 3년 상을 마친 후 36세에 다시 상주 노곡으로 돌아왔고, 45세에 우리 도학의 전 과정을 서술한 문제작 『도동록(道東錄)을 저술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영남의 사림들과 갈라지기 시작한다. 47세에 문경 화음산 아래로 옮겨 2년 동안 그곳에서 저술과 편찬에 몰두했으며, 49세에 노곡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괴로운 심정을 해소하고 학문의 새로운 전환을 위하여 지리산·가야산·청량산·금강산·속리산 등을 유람했다. 유람에 대한 기록을 모아 이만부는 조선 최고의 기행문으로 일컬어지는 『지행록』을 님겼다.
54세에 류씨 부인을 잃고 58세에 금릉 섬봉으로 옮겼다가 59세에 상주 노곡으로 다시 돌아왔다. 66세부터 생애 마지막 작업으로 『퇴계선생언행록』 발간사업에 진력해 69세 초가을에 완성했다. 이로부터 몇 달 후인 영조 8년(1732) 12월 18일 세상을 버렸다. 이에 앞서 1730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조현명이 지방 국립대학격인 낙육재를 부흥시키려하자 상주향교 도원장이었던 이만부는 이 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한편 그는 『식산문집』 38권을 비롯해 『사서강목』 7권, 『독서법』 2권 등 총 140권에 이르는 저서를 남겼다.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학자와 저술의 길을 가겠노라고 선언한 대로 평생 성리학을 연구했으며, 조선후기 영남 사림의 거장이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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