會貫萬之道理 만 가지를 꿰뚫는 도리 모아
爲方寸之獨樂 마음속에 홀로 즐거워하니
夫孰知窮山裏一茅堂坐臥 궁벽한 산속 한 초가집에 앉고 누워서
有可以與天地萬物相爲流通 천지만물과 서로 유통하여
恒活活而洋洋 항상 너르고 충만함 알겠는가
到此地頭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吾堂爲天地耶 나의 집이 천지인가
天地爲吾堂耶 천지가 나의 집인가
萬物爲我耶 만물이 나인가
我僞萬物耶 내가 만물인가
今日爲太古耶 금일이 태고인가
太古爲今日耶 태고가 금일인가 알 수 없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여헌선생문집』 권1에 들어있는 「만활당부(萬活堂賦)」의 글이다. 만활당은 과거 영천지역이었지만 현 경북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에 있는 입암서원의 부속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피난 와서 강학활동, 즉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지내던 생활공간이다.
여헌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가 천지만물이 서로 소통하는 경계이다. 그 경계에서는 “나의 집이 천지인지 천지가 나의 집인지, 만물이 나인지 내가 만물인지”가 구별되지 않는 완전한 주객일치를 실현한다. 주객의 대립이 소멸되고 통합과 융섭이 일어나는 이른바 ‘만활(萬活)’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헌이 입암정사와 경북 구미의 부지암정사 등에서의 강학활동은 모두 이 마음이 스스로 활물(活物)이 되고, 사람들로 하여금 천지만물이 서로 유통하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닦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가 지향한 공부의 방향이었다.
여헌이 지은 입암정사의 기문(『여헌선생문집』 권1, 「입암정사기(立巖精舍記)」에도 그가 지향한 공부의 목표가 잘 드러나 있다. 여헌은 이 기문에서 조선조의 유자들이 왜 정사를 세우고자 했는지를 알려주는 가장 전형적인 문장을 보여주고 있다. 깊은 산 속에 은거하고자 하는 일이 세속을 버리고자 하는 이단을 흉내 낸 것이 아니라, 성정을 닦음과 동시에 덕을 닦고자 하는 유학의 본질에 충실하고자 한 내용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대한 고민을 크게 한 유학자였다. 그는 정치인들의 분열과 파당화가 초래한 전란의 비극을 직접 경험했고, 그 바탕 위에서 기왕의 성리학적 사유가 분열을 가속화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그는 성리학적 사유의 본질이 분열이 아니라 통합임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헌은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과도 대화했고, 조정에 서서는 치우침이 없는 인재등용을 건의했다.
그러면 여헌 장현광은 누구인가? 그는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17세기 초반 영남지역의 학문적 분위기를 크게 고조시킨 학자로 퇴계 이황 이후로 영남지역에서 한 학파를 형성한 대학자였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써 이황의 문인들 사이에 확고한 권위를 인정받았다. 류성룡 등의 천거로 여러 차례 내외의 관직을 받았으나, 1602년(선조 35)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정부의 주역(周易) 교정사업에 참여하고 이듬해 잠깐 의성현령으로 부임한 것 외에는 모두 사양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의병과 군량의 조달에 나섰으며, 이후 입암산에 은거한지 반년 후에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위의 글에서도 봤지만 유학의 입장에서 조화의 논리로 융화 종합하는 철학적 근거를 명시하였다는 데 있다. 여헌은 류성룡·정경세 등과 더불어 영남의 수많은 남인 학자들을 길러냈으며,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힘을 기울였으며, 산림의 한 사람으로서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하였다.
그는 18세 때인 1571년(명종 4)에는 일생 동안 진행할 학문 계획서인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지었다. 여헌이 영남사림의 중망을 받기 시작한 것은 40세를 전후한 시기였다. 사림의 신망에 조정의 소명이 더해지면서 그의 학문적 위상도 더욱 높아졌으나 이듬해인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해 선산·의성·포항(영천)·청송·봉화 등에서 피난하고 우거하게 됨으로써 본격적인 강학기반이 조성되기는 어려웠다.
그러면 여헌이 어떻게 입암지역과 인연을 맺었을까? 입암에 입거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임진왜란이었다. 원래 입암은 1593년 유학자인 권극립·손우남이 피난처로 물색한 벽지였다. 이후 두 사람은 1595년 정사상·사진 형제와 더불어 ‘입암결사(立巖結社)’를 맺는 한편, 1596년 경북 청송에 우거하던 여헌에게 방문을 청하였다. 여헌은 입암이 지닌 장수유식처로서의 입지에 매력을 느껴 동거를 약속했고, 마침내 1597년 입암으로 들어갔다.
1599년(선조32)에는 입암정사가 건립되어 강학의 기반도 더욱 강화되었다. 입암결사 4명을 매개로 한 그의 입암 입거와 강학은 포항유림의 학풍 진작과 학맥 형성에 적잖게 영향을 미쳤다. 확인된 포항지역 여헌 제자의 숫자는 대략 40여 명이다.
물론 여헌의 입압 강학처 외에 인동·선산지역과 더불어 성주·칠곡 지역도 여헌학파의 주요 거점지역이었다. 의성·청송권의 여헌 제자도 30명가량이나 되었다.
그러면 영남지역 여헌의 제자는 모두 몇 명이나 될까? 종가에 내려오는 초본을 바탕으로 한 병진본은 172명이었지만, 장기상이 종가 소장의 제문을 입수하여 1917년에 편찬에 들어가 1919년 봄에 마무리를 한 기미본에는 총355명이 수록되어 있다.
여헌의 학문은 지행병진(知行幷進), 즉 학문의 길은 앎과 행함에 있다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는 55세 때 『역학도설(易學圖說)』을 편찬하기 시작하였으며, 68세 때 『경위설(經緯說)』, 75세 때 『만학요회(晩學要會)』, 78세 때 『우주설(宇宙說)』, 79세 때 『태극설(太極說)』을 저술하였다.
이상으로 여헌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필자가 여헌에 주목한 데는 그가 분열보다는 융섭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조선조 쇠락의 원인도 분열과 파당화에 있었는데, 오늘날도 분열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여헌을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역사·고전인문학자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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