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오늘의 문학』 제2회 신인상으로 시작활동을 시작한 조해훈 시인이 최근 시집 《내가 낸 산길》을 ‘도서출판 역락’에서 펴냈다. 역락의 기획시집 시리즈 ‘오후시선’ 일곱 번째 시집이다. 50편의 시편마다 문진우 사진가의 흑백사진이 각각 실렸다.
조 시인의 개인시집으로는 16권 째인 이번 시집에는 그가 2017년 봄 지리산에 들어가 녹차농사를 지으며 쓴 시들이 실렸다. 조 시인은 화개골 쌍계사 위 목압마을의 농가를 얻어 산중 생활을 하고 있다. 목압마을은 고려와 조선, 일제시기에서 해방 이후까지 신선들이 사는 청학동으로 인식되던 유서깊은 마을로 쌍계사에서 불일폭포로 올라가는 언저리에 있다.
4부로 나눠진 시집에는 화개골의 자연, 주민들의 생활모습, 계절의 변화, 차산에서 농사일을 하는 일상 등이 담겼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화개골에서 있었던 빨치산과 관련한 이야기도 삽입되어 있다.
이번 시집에 들어있는 조 시인의 시편들은 몇 개의 특징이 있다. 첫째는 산문시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마치 선방의 수행자처럼 담담하고 솔직한 어조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를테면 “차산에서 일을 하고 천천히 내려오다 뒤돌아본다 한 사람만 다니는 실뱀 같은 산길이 꼬불꼬불 나를 따라 내려오고 있다…”(시 『내가 낸 산길』 부분)이나 “삼라만상 모든 잘못이 당신에게 있다고 스스로 죽비를 내리치시다보니 몸이 견디지 못하여 주저앉으신 것…”(시 『어머니는 구례병원에 와불로 누워계시고』 부분) 등의 표현이 그렇다.
둘째는 지리산 화개골의 현재 및 과거의 역사를 소묘하듯 그리고 있다. 시인이 사는 골짜기에서 50년 넘게 이발소를 운영하는 할아버지를 소재로 지은 시에서 “가위로 느리게 느리게 이발을 해주곤 의자 젖혀 얼굴 면도를 해주곤 낮은 세면대에 앉혀놓고 머리를 감겨주신다…”라며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산골의 현재 역사를 묘사하고 있다. 또한 “아지트에 도착하니 며칠 전 보았던 그 젊은이들이 토벌대의 총에 맞아 모조리 죽어 땅에 뒹굴고 있었으니…”(시 『올케 대신 밥상 머리에 이고』 부분), “여순사건 한국전쟁으로 이곳에서 눈 감긴 사람들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왜 자꾸 그들을 이렇게 찾아 나서는가…”(시 『삼정마을에서』 부분)이라며,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마치 발굴하듯 불러낸다.
셋째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간에 그들의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저간에 깔고 있음도 읽을 수 있다. “잠시 뒤에 보니 새끼가 몸에서 나오다/ 노아도 새끼도 이미 목숨이 끊어진 상태였으니/ 충격 크고 마음 아프지만 정이 많이 든 노아/ 아, 죽음이든 삶이든 그저 한 세상 아니던가/ 어디일지 모르지만 너와 새끼들 영혼 편히 잘 가거라”(시 『노아의 죽음』)라며, 어느 날 모르는 새끼 고양이 노아가 집 현관에 나타나 매일 밥을 주며 함께 지냈는데 새끼를 낳다 죽자 명복을 빌고 있다. “세상의 생명은 모두 각자의 가치를 지닌다 내 키의 두 배가 넘는 차산의 억새도 마찬가지이니 …너흰들 낫으로 자르면 육체의 아픔뿐 아니라 마음의 상처가 없을까만 …”이라며, 차산에 대나무처럼 자라는 억새를 낫으로 자르면서 그들도 생명이 있어 아플 것이라고, 모든 생명체의 존엄성에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아프고 외로운 생명들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세상에서 밀려나고, 눈길 받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시인의 시선이 그윽하고 섬세하다 볼 수 있다.
넷째는 50편의 시 중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이 차산에서 일을 하는 모습과 찻잎을 따 제다를 하는 과정을 읊은 내용이다. “차나무 사이로는 낫으로 베어낸 억새가 시위하듯 드러누워 나를 바라본다 …놀라 베어 내려고 왼손으로 잡고 있던 가시를 나도 모르게 쭈우욱 훑어버렸으니 아야, 실장갑 꼈다지만 가시들이 손에 그대로 다 박혀버렸다…”(시 「가시를 움켜잡고 뜯으니」 부분), “이렇게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픈 적은 없었다 다섯 번째 덖어 덕석에 뜨거운 차를 올려 비비곤 허리 잡고 잠시 쉰다 밤, 초록의 찻잎 갖고 마술을 부리는 중이니…”(시 「나는 다부다」 부분)에서 보듯 차농사를 짓는 일이 무척 고단함을 역설하고 있다. 차농사를 기계로 편하게 짓는 현실에서 가장 높은 곳의 차산에서 무식하게(?) 낫 한 자루로 옛날 농민들처럼 전통적인 방식으로 힘들게 일을 하는 모습은 마치 스스로 고행을 자처하는 듯하다.
다섯 번째는 한시나 한문 문장에 종종 쓰이는 ‘乎(호)’·‘耶(야)’ 등의 어조사 및 감탄사의 뜻을 나타내는 ‘아,‘자(字)를 많이 쓰고 있다. 한시 전공자인데다 한시를 짓고 있는 시인의 의도적인 습관일 수도 있다. 이는 고전시가와 현대시를 접맥하려는 차원에서 고전문에 쓰이는 어조사를 대입시킨 것이다. 산문시가 주를 이루는 것도 같은 맥락일지도 모른다. “아, 솜털처럼 줄줄이 달린 진한 분홍빛 꽃이라니 삼신마을 B카페 앞 내 눈빛과 마주친 꽃들”(시 「개복숭아꽃」), “아, 그 분들에 대한 먼 그리움으로 풀어놓는다”(시 「악양정 마당에 서서」) 등에서 그러한 시작 형태를 간파할 있다.
시인은 인간의 실존을 역사에서 살펴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보니 이번 시집에서도 지리산에서도 가장 깊은 골짜기에 속하는 화개골에서의 삶과 주민들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또는 ‘지나간 일을 상기하며’ 지은 시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면서 도시민들이 살아가는 것과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화개골 사람들의 모습뿐 아니라 의식까지 시로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곳 할머니들은 살면서 마음에 만들어진 어떤 막 같은 게 있는 것 같으니 그건 결코 허물 수 없는 한 집안의 여자라는 생각의 장벽이다 누구의 강요라기 보단 생존을 위한 경험에서 나온 지혜일지도”(시 「멋쟁이 할머니들」 부분)처럼 말이다.
<인저리타임 편집위원장·동아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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