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화개지역 한지 이야기」 (1)프롤로그

하동 화개의 한지 생산에 대한 단초

조해훈 승인 2020.06.17 22:20 | 최종 수정 2020.06.21 23:09 의견 0
사진 위쪽으로 보이는 마을이 화개면지역에서 한지를 주로 생산하던 가탄마을이고 그 너머가 대비마을과 도심마을이 있다.
사진 위쪽으로 보이는 마을이 화개지역에서 한지를 주로 생산하던 가탄마을이고 그 너머에 대비마을과 도심마을이 있다.

※편집자 註 : 경남 하동군 화개면지역의 한지 생산과 관련한 기사를 부정기적으로 연재한다. 우리나라의 중요한 한지 생산지역은 아니었던 탓에 자료부족으로 일일이 발품을 팔아 생존해 있는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야 하는 등으로 인해 쉬운 작업은 아니다. 1960년대 말 또는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외지로 점차 떠남에 따라 이 지역의 한지 생산은 중단되고 만다. 화개지역에 차(茶) 생산이 주요 생산품으로 떠오르기 이전에 탑리 가탄마을과 정금리 대비마을 등을 중심으로 한 한지 생산이 농가소득에 큰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지금은 그 흔적이 사라져버린 이 지역의 한지 생산과 관련한 퍼즐을 하나씩 맞춰보려고 한다.

녹차의 본고장으로 알려진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 수십 년 전까지 한지(韓紙)를 제작하던 곳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화개지역의 주 생산물인 차에 대해서는 소개와 홍보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많은 국민들이 알고 있지만, 화개에 차가 본격적으로 상품화되기 이전에 주요 농가소득으로 한지를 생산하였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 지역의 한지에 대한 연구 논문이나 단행본 등은 말할 것도 없고, 해당 지자체인 하동군에서도 이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없는 것은 물론 화개면사무소에도 관련 자료가 거의 없는 상태이다.

필자는 다른 논문을 쓰기 위하여 어느 자료를 읽던 중 화개지역에 한지를 생산하였다는 내용을 접한 적이 있어 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주민들로부터 화개지역의 가탄마을과 대비마을 등을 중심으로 한지를 만들던 공간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략적으로라도 이에 대한 정리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따라서 한지 제작 공간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를 하고, 또 그 공간이 있었던 곳을 답사하고, 각종 자료를 찾아 이를 뒷받침해 이 지역의 한지의 역사성과 얽힌 스토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화개지역의 문화콘텐츠를 발굴해내는 것의 일환이자 동시에 묻혀버린 역사를 재조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진에서 가탄교 건너 왼쪽 계곡가에 보이는 건물 인근이 가탄마을에서 가장 큰 한지 생산 작업장이 있던 지역이다.
사진에서 가탄교 건너 왼쪽 계곡가에 보이는 건물 인근이 가탄마을에서 가장 큰 한지 생산 작업장이 있던 지역이다. 

우선 필자에게 한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준 분들은 현재로는 가탄마을의 손석태(66) 사장님, 대비마을이 고향으로 현재 용강리 삼신마을에서 흔적문화갤러리를 운영하고 계시는 이말순(64) 사모님, 정금리 도심마을 출신으로 용강리에 거주하고 있는 오재홍(41) 차인(茶人) 세 분이다. 이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께서 한지를 생산하는 일을 하였으며, 손 씨와 이 씨는 어릴 때 부친이 한지를 만들던 작업을 도운 기억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짬이 날 때마다 화개에서 생산하던 한지에 얽힌 이야기와 역사성을 밝혀낼 생각이다. 그렇다고 이 지역의 한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메모 형식으로 조금씩 기록하다보면 보다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물론 하동군에서 차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작업을 통해 한지가 많이 생산되던 마을 어디쯤에 규모가 크지는 않더라도 ‘화개 한지박물관’(가칭)을 설립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이는 하동군의 새로운 문화 소프트웨어 개발 차원,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이 지역의 또 다른 역사성을 보여주는 자료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진에서 정금교 건너 왼쪽 계곡가에 보이는 송이펜션 건물이 한지를 생산하던 공간이다.
사진에서 정금교 건너 왼쪽 계곡가에 보이는 송이펜션 건물이 한지를 생산하던 공간이다.

자, 그러면 화개에 그런 한지 생산 공간들이 어디에 있었을까?

손석태 씨는 2020년 6월 16일 백혜마을 초입에 있는 카페루나에서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국민학교 다닐 때 한지를 만드는 작업장에 가 통에 든 ‘딱풀’을 발로 밟았다. 3종류의 종이를 만든 것으로 기억한다. 닥나무 껍질이 붙은 질긴 종이와 붓글씨를 쓸 수 있는 얇은 종이, 여러 겹으로 만든 두꺼운 종이를 만들었다. 지금도 가탄마을 일원에 닥나무가 자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이말순 씨는 2020년 5월 30일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제 아버지도 한지 만드는 일을 하셨다, 저도 어릴 때 종이 접는 일을 거들었다. 당시에 학교에 가지 않는 일요일이나 방학 때에는 일 히는 게 싫어 징징 울면서 종이를 접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기억하고 있는 한지 제작 공정을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이 씨는 “대비마을 초입에 있던 제 집과 현재 정금리 정금교 화개동천가에 신재욱(61) 씨가 운영하는 송이펜션 자리도 한지를 만들던 공간이었다. 아마 대비마을 위쪽에도 한지를 만들던 작업장이 있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천년 차나무’가 있던 도심다원의 장남인 오재홍에 따르면 “제 할아버지께서 닥종이 공장을 운영하셨다. 최근까지 당시에 사용하던 도구들이 있었다”라고, 최근 필자와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 세 분의 초보적인 이야기를 단초로 삼아 화개지역의 한지 생산 상황이 어떠했는지 그 시절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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