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처님 오신 날’이 원래 양력으로 4월 30일이었으나, 코로나19가 종식되지 않아 한 달 뒤인 5월 30일로 연기되었다.
필자는 자동차가 없어 하루 전날인 29일에 화개공용터미널에서 오후 6시45분에 출발하는 부산행 시외버스를 타고 갔다. 사상터미널에 내려 15번 시내버스를 타고 동아대 부민캠퍼스 앞에서 내렸다. 거기서 걸어 부산대병원 앞까지 가 마을버스②번을 타고 감천문화마을에서 내려 마을 안으로 들어가 관음정사로 갔다. 절에 도착하니 밤 10시반가량 되었다.
주지스님인 보우스님은 2층 차실에 계셨다. 스님께 절을 한 번하곤 인사를 드렸다. 간단하게 스님과 차를 마신 후 방에 자러 갔다. 스님이 주무시는 옆방으로 가끔 절에 오면 자는 방이었다. 스님은 “새벽에 보살님들이 음식 준비하러 오신다”고 하시어, “그러면 스님 일어나실 때 함께 일어나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모기 때문에 얼른 잠을 청할 수 없어 애를 먹다 잠이 들었다.
이튿날 새벽 3시30분에 일어났다. 스님도 일어나시어 먼저 세수를 하셨다. 스님이 부처님께 예불을 올리기 위하여 법당으로 가시자 따라갔다. 함께 예불을 드렸다. 예불이 끝난 후 차실에서 스님과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 그러고 있는데 바라보이는 오륙도 쪽에서 불그스름한 기운이 솟아나더니 온통 하늘을 붉은 색으로 물들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일출의 장관이었다.
관음정사는 필자가 있는 지리산 화개동의 웬만한 암자보다도 규모가 작을 뿐 아니라 볼품이 없는 사찰이다. 스님은 ‘1970년대에 비구인 대성 스님께서 이 절을 시작하실 때는 거의 거적때기를 덮은 움막 수준이었다“고 설명하셨다. 서서히 날이 밝아지자 법당 뒤쪽으로 담장이 없어지고 개활지처럼 흙무더기가 보였다. 절 바로 위로 차도를 내는 공사 중이었다. 공사 중에 시멘트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나 중단되다보니 볼썽사나운 모습이었다. 대문이 있는 법당 건너 쪽도 주차장 공사를 위하여 포클레인으로 흙과 돌을 파내다 마치 부도가 난 공사장처럼 황량하였다.
부엌에서 보살님들이 음식 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전 7시반쯤에 스님과 아침 공양을 하였다. 좀 있으니 신도들이 한 분 두 분 오시어 법당에서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스님도 “신도들이 오시니 법당에 좀 가야겠다”며, 가사를 걸치고 나가셨다. 오늘 행사는 오전10시부터 낮12시까지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다.
필자는 불심이 가득한 불자는 아니지만 스님과의 인연으로 지난해 가을에 세상을 버리신 어머니의 49재를 이 절에서 올린 바가 있다. 오전 9시가 좀 넘으니 류분식 선생님이 오셨다. 대구 성서가 고향으로 안동교대를 나오신 후 부산에서 오랫동안 교직생활을 하시다 교장 선생님으로 퇴직하시고 시낭송 및 시작업도 병행하시고 있다. 지리산 필자의 집에도 여러 차례 오시고 어머니 상 때도 조문을 오셨으며, 마치 친 누님같이 인정이 많은 분이시다. 류 선생님의 교대 선배이신 한상규 전 한국폴리텍대학 동부산캠퍼스 학장께서도 오셨다. 남명 조식 연구의 권위자로 불리는 한 전 학장님은 최근에 그림을 그리시고 글씨도 쓰시는데 필자에게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이란 글귀를 나무에 적은 작품을 선물해주셨다.
좀 있으니 감천문화마을 치안센터장이라는 경찰 분도 오시고, 이 마을에서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80대의 어르신도 오셨다. 필자와 같은 함안 조씨로 시를 쓰시는 조현무 선생님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차실에서 여러분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법당에서 본격적인 부처님 오신 날 행사가 시작되었다. 법당이 크지 않아 할머니 신도들은 안에서, 한 전 학장님과 필자 등 남자들은 법당 바깥에 서서 행사에 참석하였다. 신도회장님도 마이크를 잡고 행사를 도왔다. 김종오 동의대(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은 참가자들에게 코로나 관련 열 체크를 하고 기록을 하는 걸 담당하셨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배동순 동백시낭송회장님이 남편분과 오셨다. 쇠고기를 다져넣어 부친 전과 김밥을 준비해오셨다. 행사 참가자들에게 이걸 판매하여 불우이웃 돕기에 쓴다고 하셨다.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암송하시고 신도들도 따라하고 절을 하는 등 두 시간 동안의 행사가 끝났다. 바로 점심공양으로 들어갔다. 공사 때문에 담도 없는 흙바닥에 자리를 펴고 상을 차려 점심을 먹었다. 다행히 바람이 불지 않아 흙먼지가 날리지 않았다. 류분식 선생님이 김밥과 전을 많이 주문하시곤 불우이웃돕기 성금함에 돈을 넣으셨다. 덕분에 같은 자리에 앉은 필자가 많이 먹었다.
점심을 먹은 후 이야기를 나누다 차실에 올라가 또 차를 마셨다. 정익진 시인 부부께서 오셨다가 “일이 있다”며 인사만 하고 가시고, 시 전문계간지 『사이펀』을 발행하는 배재경 시인 가족도 왔다. 딸도 시인으로 드물게 일가족이 시인이다. 그렇게 덕담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오후 3시쯤 필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상터미널에서 오후 5시30분에 화개로 출발하는 버스를 타기 위함이었다. 좀 일찍 가서 터미널에서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류 선생님과 여러 분이 화개로 가면서 먹으라고 김밥과 떡 등을 비닐봉지에 담아주셨다.
사상터미널로 와 피곤하여 커피를 한 잔 마시며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에 오르면 피곤하여 바로 잠을 자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오후 5시30분에 버스가 출발하여 잠을 청했으나 몸은 피곤하였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버스는 진교시외버스터미널에 들렀다가 하동에 도착하니 오후 7시10분쯤이었다. 거의 40분 후인 7시50분에 출발한다고 기사 아저씨가 말씀하셨다. 허리가 아파 버스에서 내려 대합실 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버스가 출발하여 마침내 화개에 도착하니 오후 8시12분이었다. 거기서 다시 목압마을의 집으로 오니 늦은 시간이어서 스님이 피곤하실까봐 도착 전화를 드리지 못하였다. 피곤하여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잠에 빠져들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부처님 오신 날 행사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한 것이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