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의 독자들은 조선 제10대의 왕인 연산군(재위 1494∼1506)에 대해서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생모 윤 씨의 폐비에 찬성했던 윤필상 등 수십 명을 살해하는 등 폭정을 한 점이 많아 왕위에서 쫓겨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조선 제15대 왕인 광해군(재위 1608~1623)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이에 이번 글에서는 광해군이 어떻게 해서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는지, 그리고 그의 일생에 대해 얽힌 이야기를 상·중·하로 나눠 해보려한다.
광해군은 1575년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재위 1567∼1608)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후궁인 공빈 김 씨였다. 선조는 정비인 의인왕후 박 씨가 있었으나 그들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선조는 대신 9명의 후궁에게서 13명의 왕자를 두었다. 의안군·신성군·정원군·순화군·인성군·의창군·경창군 등의 왕자가 그들이다. 그 가운데 공빈 김 씨 몸에서 태어난 임해군과 광해군이 각각 장남과 차남이 된다. 어머니는 출산 후유증으로 광해군이 세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은 친형 임해군이나 배다른 형제들에 비해 총명하고 학문에 힘썼다고 「정무록」과 『공사견문록』 등 여러 기록에 보인다. 정무록은 조선 중기에 대사헌을 지낸 황섬의 아들인 황유첨이 정미년(1607) 10월에서 무신년(1608) 8월까지 10개월간에 일어난 당쟁을 기록한 것으로 『대동야승』 권82에 수록되어 전한다. 공사견문록은 효종의 사위인 정재륜(1648~1723)이 궁궐을 출입하면서 적은 견문록이다.
광해군이 성장할 당시에는 16세기 초반 이래 지속되어온 척신정치가 끝나고 그들의 정치적 박해를 받았던 사림파들이 대거 조정에 진출하였다. 척신정치는 이른 바 훈구와 외척들이 정치판을 좌지우지하는 행태를 일컫는다. 훈구척신들의 반격으로 많은 사림들이 희생되었는데, 바로 그것이 연산군 대에 시작하여 명종 대까지 일어났던 4대 사화(士禍)였다.
선조의 즉위하였으나 척신들이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을 처리하는 방향을 놓고 이제 조정에서 주류적 위치로 부상한 사림들 내부에서 분열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바로 과거 청산에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던 동인과 서인의 분립이었다. 동인은 주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에게서 수학하였던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유성룡·김성일·정탁·김우옹·정인홍·김효원 등 영남 출신 사림들이었다. 서인은 박순·윤두수·정철·이이·성혼 등으로 기호지방 출신이 많았고 대체로 동인들에 비해 연장자들이었다. 양당 사이의 분열이 이른바 동서분당이자 조선왕조에서는 붕당 사이의 대립이 시작되는 출발점이었다.
그런 와중에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이이의 제자였다가 동인으로 당적을 바꾼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다가 자살하였다는 사건이다. 그가 ‘천하는 공물(公物)’이라는 생각을 지녔으며, 차별과 갈등이 없는 유토피아의 세계를 실현하려는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다고 한다. 정여립이 실제로 모반을 하였다고 확실히 드러난 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이 사건이 서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은 당시부터 제기되었다.
여하튼 선조는 정여립과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수사를 「관동별곡」 등과 같은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려진 서인 정철에게 맡겼다. 정여립과 일면식이 있는 사람이면 전부 끌려와 고문을 당했으며, 죽는 사람이 늘어나고 사림 사회의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흉흉해졌다. 남명 조식 문하의 수재였던 최영경도 그 과정에서 죽는 등 1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최경영 등의 죽음을 불러온 기축옥사를 치른 뒤에 조식과 서경덕 계열의 사람들이 북인으로 떨어져나갔다. 이황의 제자들은 남인이 되었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다시 갈라진 것이다. 결국 기축옥사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남인·북인·서인의 붕당이 생겨나게 되었다.
1591년 서인의 영수 정철은 선조에게 왕세자를 세우라고 건의하였다가 실각함으로써 다른 서인들 역시 집권적 위치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듬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다. 바야흐로 7년여에 걸친 대전란이 시작된 것이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조선군은 수적으로도 열세인 데다 여러 면에서 왜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선조에게 종묘사직의 장래와 민심 수습을 위해 왕세자를 책봉해야 한다는 건의가 나왔다. 선조는 광해군을 지목하였다. 4월 29일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광해군이 왕세자로 결정되었다. 이튿날인 4월 30일 새벽에 광해군이 선조를 따라 경복궁을 나와 피난길에 올랐다.
선조는 5월 20일 평양에 머물면서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한다는 교서를 다시 반포하고 인사권과 상벌권을 넘기는 분조(分朝)를 맡기겠다고 하였다. 분조란 말 그대로 조정을 둘로 나눈다는 것이다. 일단 서울을 떠나 종사 회복을 위한 계책을 마련코자 했던 선조는 전황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왜군의 추격이 계속되자 커다란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광해군에게 자신의 권력을 일부 떼어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전쟁을 수행하고 민심을 수습케 하려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광해군에게 ‘임시정부’를 맡긴 셈이었다. 그러면서 최악의 경우 선조 자신은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들어가 명에게 의탁할 계획을 세웠다. 명나라 조정은 선조가 요동으로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보고받았다. 이에 북경의 명 조정 역시 당황하였다. 만약 선조가 요동으로 넘어올 경우 적절한 거처를 마련해주지만 선조 일행과 함께 피난민들이 섞여 들어오는 것은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광해군이 분조를 잘 이끌었다고 역사가들은 평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성과는 백성들에게 조정이 아직 건재함을 알렸다는 것이다.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한 뒤로 삼남 지방을 비롯한 조선 팔도에 대한 조정의 통제력은 힘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처음 출발한 것은 1592년 6월 14일이었다. 그는 이후 12월까지 평안도와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 등의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면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의병의 모집과 전투의 독려, 군량과 말먹이의 수집 운반 등 전란 수행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에 백성들은 조정이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여기저기서 광해군의 분조를 향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바야흐로 분조는 민심을 수습하고 전란을 수행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분조활동으로 인한 광해군의 고초는 상당하였으며, 이러한 기록은 광해군을 수행했던 유대조가 올린 상소문에 상세히 나왔다. 하지만 정족산본 『광해군일기』에는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이는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축출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했던 것이겠지만, 왜란 당시 광해군의 활약은 그를 비판하는 측에게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돋보였던 것만은 분명했다. 어쨌든 눈부신 분조 활동으로 광해군에 대한 조야의 신망은 높아졌고, 왕세자로서의 위치는 굳어진 것처럼 보였다. -계속-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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