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고사리가 조금씩 올라와 이른 아침 어렴풋할 무렵에 스틱을 짚고 차산에 오른다. 올해 첫 고사리는 3월 29일에 땄다. 그런데 밤에 기온이 계속 내려가는 탓에 아직 고사리가 잘 올라오지 않는다. 오늘 4월 10일까지 채취하여 말린 게 겨우 1근반(900g)밖에 되지 않는다.
산에 올라가면 고사리만 꺾는 게 아니다. 지난 해 한창 고사리를 딸 시기에 몸이 좀 좋지 않은 데다 청탁 받은 원고가 밀려 산에 올라가지 못하다보니 고사리가 피어 누렇게 드러누워 버렸다. 해마다 겨울에 묵은 고사리를 낫으로 모두 베는데. 올해는 도중에 교통사고가 나 3주간 입원한 데다 통원치료를 하고 있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였다. 지금에야 겨우 마무리 단계이다. 최근에도 허리와 목이 아파 한 손으로 허리를 받쳐 기껏해야 하루에 2시간가량 일을 해왔다.
고사리를 꺾고 묵은 고사리를 베어내는 게 주된 일이 아니다. 옛 차산 주인이 산 중간의 일정 면적에 있는 차나무를 베어낸 후 고사리 뿌리를 심어 수확을 하였다. 그 분은 낫으로 일을 하는 필자와는 달리 해마다 예초기로 묵은 고사리를 제거하면서 차나무를 계속하여 베다 보니 차나무는 흔적조차 없었다. 그걸 안 필자는 차농사를 짓기 시작한 2017년 첫해부터 ‘차나무 살리기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프로젝트라 하여 정부의 예산을 받아 보기 번듯한 무슨 거창한 사업을 하는 게 아니다. 손으로 흙을 조금씩 걷어내 차나무 뿌리만 남아있는 부위에 햇볕이 가득 내리도록 좀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차나무는 워낙 생명력이 강하여 뿌리만 제대로 살아있으면 언젠가는 싹을 틔운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차나무 뿌리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다가 조금씩 살아나는 것일까. 이듬해인 2018년 봄에 보니 한두 군데 아주 작은 찻잎이 한 잎 혹은 두 잎 가량 올라왔다. 너무 기뻐 집에서 가파른 등산을 한참이나 해야 하는 거리이지만 물조리개에 물을 가득 담아 힘들게 들고 올라 흠뻑 뿌리까지 적셔주었다. 그 이듬해인 2019년에 보니 그것들이 모두 살아나 잎이 좀 더 달렸다. 2020년인 요즘 보니 차나무 씨가 옆에서 굴러와 잎이 한두 개 올라오는 것들도 있다. 3, 4년 키운 것은 잎이 제법 달렸고 줄기도 제법 웃자랐다. 이만하면 차나무 살리기 프로젝트가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어린 영혼들을 살리기 위하여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주변을 치우고 차나무를 어루만져주고 있다. 마치 할아버지가 예쁜 손주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좋은 말을 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나름대로 필자의 온기와 기운을 어린 차나무들이 받아 더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해마다 늦가을쯤에 차씨를 채취하여 기름을 짜 마시는 필자는 재작년이나 지난해에도 차나무가 없는 빈 공간에 차씨를 좀 심어볼까 생각하다 그만두기로 하였다. 잘려나간 차나무 뿌리에서 올라오기를 더 기다려도 될 것 같고, 인근에서 굴러온 차씨가 싹을 틔우는 등 자연스러운 것이 낫겠다 싶어 그런 것이다.
필자는 기독교나 불교 등 특정 종교인은 아니지만 생명이란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늘 여긴다. 특히 차나무에 대한 필자의 애정은 누가 따라온다면 서러워할 정도이다. 따라서 이 영역에 올라온 차나무가 아직 몇 되지 않다보니 차밭이라고 말하기에는 민망하지만, 그래도 필자는 언젠가는 이 고사리밭이 원래의 차밭으로 복원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필자의 차밭은 마을 뒷산인 목압산(木鴨山) 또는 무이산(武夷山)의 차밭 중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있다. 일부러 좋은 차가 생산되는 차밭을 구한 것이다. 차밭 위로 두어 시간여 산길을 따라 걸으면 단천마을을 거쳐 의신마을까지 이어진다. 필자가 차밭에 일절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낫 한 자루만으로 일 년 내내 억새와 가시, 잡풀, 묵은 고사리 등을 베며 일을 하는 데는 차나무의 생명과 그들의 성품을 알고 있어서이다. 그리고 그만큼 차나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계에 의해 무자비하게 웃자란 부위가 잘려나가면 아플까봐 그렇다. 왜냐하면 강인하지만 섬세한 성질을 가진 그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을까봐 그런 것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기계로 멋지게 관리하면서 거름을 하는 차밭보다는 수확이 훨씬 적다.
필자가 찻잎을 따는 모습을 누가 본다면 반드시 흉을 볼 것이다. 마치 찻잎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빨리 빨리’ 따는 것이 아니라 이 차나무에서 한두 잎, 천천히 차나무를 희롱하듯 따고 또 저 만큼 가서 다른 나무에서 조금 따고 종일 차산을 헤매면서 채취하여도 사실 1kg도 되지 않는다. 그런 행위가 필자가 지리산 화개동의 목압마을에 들어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지금은 당쟁이 심하였던 조선시대에 조상이 희생이 되거나 외로운 섬이나 험한 지역에 위리안치 되어 유배 도중 세상을 뜨는 등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일찍이 세상에 나가기를 포기하고 은거하던 왕조시절은 아니다. 하지만 필자는 그보다도 더 한 여유로운 정서를 가지고 세상과 등진 채 가족 및 벗들과 나눠 마실 요량으로 성품대로 차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청학동’으로 일컬어지던 불일폭포로 올라가는 초입인 목압마을에서 말이다.
현실적이지 못한 필자는 아직도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다. 그건 필자의 선친인 구학(丘壑) 조길남(趙吉男) 어른이 원하셨던 것처럼 시인의 마음자리를 이곳에 풀어놓고 있는 것이다. 꼭 중국 강소성 태호의 벽라춘(碧螺春), 절강성 항주 서호의 용정차(龍井茶), 복건성 무이산의 대홍포(大紅抱)나 복건성 안계의 철관음(鉃観音), 운남성의 보이차, 호남성 악양 동정호의 은침차(銀針茶) 등처럼 유명한 차 생산지로 가꿀 생각은 전혀 없다. 로스쿨에서 공부하고 있는 큰 아들 조현일이 이곳에 들어오고 싶다고 하나 필자가 차밭을 잘 가꿔 그에게 물려줄 생각도 전혀 없다. 그가 들어와 필자처럼 살든 그렇지 않든 그건 자신의 철학과 생각, 삶의 태도에 달려있는 문제이다.
오늘도 차산에 올라 이 어린 찻잎들을 만져준다.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햇살을 많이 받아서인지 어제 아침보다 찻잎 색깔이 조금 더 진해진 것 같다. 그 옆에 주저앉는다. 맞은 편 용강마을 뒷산인 황장산(黃獐山·942.1m)에도 거의 중턱까지 누렇게 고사리밭이 조성되어 있다. 저곳에도 차밭이 고사리밭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차밭 아래에도 2, 3년 전에 차나무를 베고 고사리를 수확하는 밭이 있다. 그곳에도 조금씩 보이던 차나무가 해마다 예초기로 바닥까지 바싹 베어내니 언제 그곳이 차밭이었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고사리밭으로 변하여 있다. 그 아래 조금 더 큰 밭도 마찬가지이다. 이곳 농민들의 생계를 위한 고육지책임을 필자는 잘 알고 있으므로, 가타부타 입을 댈 형편은 아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속으로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하든 필자는 이 고사리밭을 언젠가는 차나무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차밭이 되기를 기원하며 차나무 살리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초의선사가 『동다송』에서 화개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차밭이 40, 50리에 펼쳐져 있다고 한 것을 기억하는 필자는 이곳이 그런 지역으로 다시 조성되기를 희망한다. 이곳의 차밭이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지 않은가. 물론 현재에도 화개골짜기에는 산마다 차밭이 조성되어 있다.
모든 생명체가 다 그렇지만 차나무도 가꾸는 사람의 진정한 마음, 즉 소리 없이 자신들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 어루만져주고 닦아주는 것을 알고 있다. 차나무는 그러한 마음과 손길을 원천삼아 힘겹게 힘겹게 인간에게 이로운 생명을 피워 올리는 것이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