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 이야기 (29)정엽이 옥산서원 유의건을 찾은 까닭은
조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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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3 04:36 | 최종 수정 2020.03.22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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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에 경주지역에서 큰 선비로 활동하였던 화계 유의건(1687~1760)의 문집인 『화계집』 권2에 <여장이 옥산서원을 방문하여 하룻밤을 자고 돌아가기에 앞의 운을 다시 차운하여(汝章訪余於玉院 一宿而歸 復次前韻)>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시가 실려 있다. 여장에 대해서는 좀 있다 설명하기로 하고 먼저 시를 읽어보자.
누각 위에 있던 해가 기울고 있는데
정이 많은 산새가 그를 향해 우네.
귀에 매미소리 가득한 것처럼 맑으시고
뛰어난 인품을 믿으니 혼미해지지 마시길.
樓上分明日欲低(누상분명일욕저)
多情山鳥向人啼(다정산조향인제)
蟬聲滿耳淸如許(선성만이청여허)
懷仰高風夢不迷(회앙고풍몽불미)
위 시는 하계(霞溪·현 경주시 안강읍 하곡리)에 사는 정엽이 옥산서원(〃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유의건을 방문하여 하룻밤을 자고 돌아감에 대한 안타까움을 읊은 작품이다.
자가 여장(汝章)이고 호가 식호와(式好窩)인 정엽이 사람됨이 맑고 인품이 뛰어났던 모양이다. 둘째 구의 “정이 많은 산새가 그를 향해 우네”, 넷째 구의 “… 혼미해지지 마시길”이라고 표현할 걸로 볼 때 정엽에게 무언가 애달픈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필자가 정엽의 사정을 감안하여 시를 해석하였다. 시가 지어진 시점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의 비통한 심정과 연계시킨 것이다.
그에게 어떤 일이 있는 것일까? 정엽의 본관은 연일이며, 그의 딸은 백불암 최흥원의 아우인 최흥후의 아내였다. 시집 간 딸이 1758년에 병으로 죽는다. 정엽은 딸의 죽음에 눈물짓는 아비의 심경을 담은 편지를 사위에게 보냈는데, 그 편지가 지금도 최흥원 종택에 남아있다.
정엽이 사위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이달 초에 자네가 보내준 편지를 받았네. 위로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자네의 마음을 모두 알게 되었으니 슬픈 와중에도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르겠네. 그러나 정신이 아득하여 살아갈 마음도 없고 또 주변에 편지를 대신 쓰게 할 사람도 없어서 이토록 답장이 늦었다네. 나는 비록 마음이 아파 시신처럼 누워있는 상황이지만 오히려 죄송하고 부끄러울 따름이라네. 하물며 자네의 어머니인 사부인은 초상을 겪으며 생긴 마음의 병이 더욱 깊어져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네. 자식들을 사랑하는 넓은 마음에 어찌 이처럼 되지 않으실 수 있겠나? 그리고 곁에서 어머님을 모시며 위로해 드리는 자네의 어려움도 상상할 수 있으니, 매번 이러한 점을 생각함에 목이 메고 고민되지 않은 적 없었다네. … …(중략)… … 나는 늙고 헐떡이는 질긴 목숨이 겨우 끊어지지 않고 있을 따름이네. 전에 자네가 보내준 편지에 슬픔을 위로하고 병을 경계하라는 뜻을 받았네. 눈물을 거두고 마음을 삭혀 슬퍼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노쇠한 나의 기력이 점차 전만 같이 않다네. … 노쇠한 껍데기뿐인 내가 말을 타고 자네에게 가는 일조차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기에 내 딸의 장례식에 가지 못할 것 같네. 딸아이가 병이 들었을 적에도 만나지 못했고 죽어 묻힐 때도 작별하지 못하니 어찌 아비 된 자로서 슬픔을 견딜 수 있겠는가? 다만 울부짖으며 내 마음만 무너져 내릴 따름이라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그대들과의 만남에 기약조차 없게 되니 더더욱 서글프다네. 사람을 불러 이 편지를 대신 쓰게 하느라 하고픈 말 다 하지 못하네. 그대들은 잘 살펴주게. 답장 보내네. 1758년 4월 16일, 복인(服人) 정엽은 편지 보내네.”(한국국학진흥원에서 번역한 내용을 필자가 일부 수정함)
이 편지는 장인인 정엽이 사위인 최흥후에게 보낸 것이다. 정엽은 아우인 매헌 정욱(1708~?)과 우애가 매우 독실하였다고 한다. 대산 이상정이 쓴 정엽의 묘갈명에 "하계에 예를 좋아하는 군자가 있었다"라는 기록을 통해 볼 때 정엽은 예법을 중시하였던 선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슬픔을 아주 자제하고 있으며, 오히려 사위와 사돈 측을 염려하고 위로하고 있다. 이러한 절제된 표현 속에서도 슬픔은 그의 눈물 자국처럼 드러나고 있다. 사돈 측에 죄인이라는 체면 탓에 딸의 장례식에 가 보지도 못하는 아비의 심경은 통한을 못 이겨 가슴을 치고 또 쳤을 것이다. ‘부모가 죽으면 자식은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정엽은 그러한 비통한 심정을 달래기 위하여 옥산서원장인 유의건을 찾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자 유의건이 서원에서 그와 하룻밤을 함께 묵으며 위로해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의건은 세 차례나 옥산서원장을 지낼 정도로 인품은 물론 학문도 뛰어났으며, 시 1천여 수를 남긴 홍유(鴻儒)였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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