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 이야기 (30)대산 이상정의 벼슬살이와 귀향의지

조해훈 승인 2020.02.17 15:30 | 최종 수정 2020.03.22 15:10 의견 0
이상정이 이기(理氣)에 대한 어휘를 모아 해설한 유학서인 필자 소장의 『이기휘편(理氣彙編)』.

대산 이상정(李象靖·1711~1781)은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본관은 한산이다. 어머니가 재령 이씨로 퇴계학맥을 이은 갈암 이현일의 손녀이며, 이재(李栽)의 딸이다.

이상정은 25세인 1735년(영조 11)에 대과에 급제해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29세인 1739년 연원찰방에 임명되었으나, 이듬 해 9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대산서당을 짓고 제자 교육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43세인 1753년에 연일현감이 되어 민폐를 제거하고 교육을 진흥하는 데 진력했다. 2년 2개월 만에 사직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자, 그대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영남 남인으로서 일찍 과거에 급제해 고향을 떠나기는 했으나 그는 끊임없이 고향으로 돌아왔고, 만년까지도 조정에서 계속 벼슬을 내렸으나 가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 이후로는 오직 학문에만 힘을 쏟아 사우들과 강론하고, 제자를 교육하는 데 전념하였다. 이상정은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병조참지·예조참의 등에 임명됐을 때도 부임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는 왜 벼슬을 마다하고 계속해서 귀향의지를 내비쳤을까? 이를 알기 위해 다음과 같이 이상정 개인 및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자.

이상정의 『대산문집』 시편들에는 벼슬살이에서 물러나 학문에 전념하려는 그의 귀향의지가 담겨있다.
이상정의 『대산문집』 시편들에는 벼슬살이에서 물러나 학문에 전념하려는 그의 귀향의지가 담겨 있다.

소퇴계로 불리는 이상정은 퇴계 이황 이후 기호학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된 영남학파에서 이황의 계승을 주창하고 일어난 이현일·이재로 이어지는 퇴계학파의 중추적 인물이다. 그는 퇴계학파의 맥을 이어 도학적 색채를 띤 시를 많이 남겼고, 문학관에 있어서도 문(文)보다는 도(道)를 중시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상정의 학문적 흐름은 동생 이광정과 남한조를 통해 유치명으로 이어지고,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곽종석으로 계승됐다.

18세기 남인의 정치적 상황은 아주 불리했다. 문화적으로는 이전 시기보다 한층 성숙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두 차례의 전란을 겪고도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당파간의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인조반정(1623년)으로 광해군과 대북 세력은 완전히 몰락해버렸고, 당파 간의 경쟁을 부추겨 왕권을 강화하는 데 이용했던 숙종이 경신대출척을 단행하면서 남인 세력이 약화됐다. 남인 세력이 약화되자 서인 세력이 독주하게 됐지만 서인은 자기들끼리 분열을 초래해 노론과 소론으로 양분됐다. 영조 때 이인좌의 난(1728년)이 일어나면서 영남 지방에 근거지를 둔 남인 세력은 또 한 번 커다란 타격을 입음으로써 더 이상 정권 장악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하지 못하게 되고, 대신 영남 내 노론세가 커져 갔다.

노론 측은 양반들과 대립을 빚고 있던 서리들과 동조함으로써 영남 지방에서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이는 지역 서리들과 남인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는 양상을 낳았다. 그 증거가 영조 14년에 있었던 김상헌서원 건립 시비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남인은 존립할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고, 그것이 퇴계학과 주자학의 고수로 자리 잡아 갔다.

이러한 남인의 소외현상은 1711년부터 1760년까지 연행록을 남긴 사신 일행의 당파를 들여다보면 노론이 주축을 이루고 소론이 가끔 끼어들었음에 비해 남인은 배제된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상정이 영남 남인으로 대과에 합격했으니 대단한 인재였다.

그는 벼슬살이로 인한 번민을 시에서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한 데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당파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남인이 설 자리가 점점 약화된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정권에서 영남 남인이 소외되어 핍박받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이상정은 현실 정치에서 벗어나 이황의 자취를 따라 학문에 정진하고자 했다. 학문 정진에 대한 그의 열망은 시 생애 전반에 걸쳐 반복되어 나타나는 주제이다.

그가 43세 때 쓴 「도중구점 道中口占」이란 시에서 “우계도력경(牛雞道力輕: 소 잡는 칼로 닭이나 잡고 있다지만, 그것은 나의 능력이 미약해서네)”이란 대목이 나온다. 자신의 처지가 도를 지향하려는 뜻(道力)이 굳지 못해(微), 은거하려던 애당초의 초심에서 벗어난 데 기인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면의 뜻은 소 잡는 칼을 닭 잡는 데나 쓰는 조정의 처사를 비판한 친구의 입을 빌려, 영남 남인이기에 겪어야 하는 자괴감을 표현한 것이다.

이상정이 1750년 주희의 「경재잠」에 대한 여러 설을 모아 편장을 나누고 해설한 책인 필자 소장의 『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
이상정이 1750년 주희의 「경재잠」에 대한 여러 설을 모아 편장을 나누고 해설한 책인 필자 소장의 『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

게다가 영조 34년인 1758년 이상정의 나이 48세에 이상정을 사간원 정언에 제수하라는 특명이 내렸으나, 이상정이 이현일의 외증손이라는 이성중의 말로 인해 취소되는 일이 일어난다. 영조 47년인 1771년에는 이상정이 강령현감에 제수되자, 이 일로 당시의 이조판서 이은이 대사간 이성수의 탄핵을 받게 된다. 이현일의 외손이기에 배척을 받고 있던 이상정을 천거했기 때문이었다.

이상정은 60세에 고산정사가 완공되자 거처를 그곳으로 옮겨 학문에 전념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다 71세인 1781년(정조 5)에 사망했다.

그의 학통은 이황-김성일-장흥효-이시명-이현일-이재의 계보를 이은 것으로 학계에서는 정리하고 있다.

이상정의 저서 및 편저로는 『사례상변통고』·『약중편』·『퇴도서절요』·『심동정도』·『이기휘편』·『경재잠집설』·『심무출입설』·『주자어절요』·『밀암선생연보』·『심경강록간보』·『연평답문속록』 등이 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참고문헌>
-김정동(2006), 「大山 李象靖 詩에 나타난 道學的 思惟」, 『大東漢文學』 25, 대동한문학회.
-송현자(2009), 「대산 이상정의 시세계 연구」, 안동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조유영(2018), 「대산 이상정의 『남유록(南遊錄)』에 나타난 여행 기록의 특징과 의미」, 『南冥學』 23, 南冥學硏究院.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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