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 이야기 (24)유배지 민초들의 핍진한 삶 묘사한 이학규

조해훈 승인 2019.10.08 15:10 | 최종 수정 2019.10.08 15:22 의견 0
②필자 소장의 『낙하생전집』.
필자 소장의 『낙하생전집』.

맨발에 노란 머리 죽도의 여인네들   赤脚黃頭竹島娘
주먹밥 하나 먹고 모래 파서 조개 줍네.   撥沙撈蛤當餱粮
십리 밖의 비린 냄새 오지동이에 실려 오니   鯹風十里隨瓷盎
그 길로 허둥지둥 시장가는 길 바쁘다네.   一路跟蹡趁市忙

위 시는 낙하생(洛下生) 이학규(李學逵·1770~1835)의 문집인 『낙하생전집』에 실린 「금관기속시(金官紀俗詩)」 중 한 수이다. ‘금관’은 경남 김해를 말하며, ‘기속’은 풍속을 기록하다는 말이니, ‘금관기속시’는 김해지역의 삶의 현장을 읊은 시라는 뜻이다.

위 시는 누런 수건을 머리에 두른 채 맨발로 주먹밥 하나로 주린 배를 채우고, 쭈그리고 앉아 조개를 캐는 죽도(현 부산시 강서구 죽도동) 여인들의 고달픈 모습을 묘사한다. 이처럼 힘들게 캔 조개를 오지동이에 담아 머리에 이고 허둥지둥 장터로 나가는 여인들의 힘든 삶의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그의 위 문집에 담겨있는 다음 시도 김해 지역의 불합리한 모순을 그렸다.

강물 같은 좋은 술에 맛있는 승가기   美酒如河臛勝歌
한 번에 천 꿰미를 포탈해도 많다 않네.   一逋千鏹未云多
장부 다루는 아전들 일 처리도 능하니   算來刀筆眞能事
새로 웅신의 이팔 처녀에게 장가드네.   新娶雄神二八娥

위 시에서 이학규는 김해 아전들이 장부를 조작하여 공금을 포탈하는 행위를 꼬집는다. 즉 아전들이 세금 외에 갖은 명목으로 자행하는 토색질을 비판하는 것이다. 첫 구의 승가기는 대마도에서 전래하여 읍내 부호들이 즐겨먹는 음식이다. 공금을 횡령하여 사치스런 음식에 젊은 첩을 거느리는 간사한 아전붙이에 대해 비판하면서 처참한 삶을 이어가는 민생들의 분노를 대변하고 있다. 이처럼 이학규는 김해지역의 아전, 서리층으로부터 양반층, 건달배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불합리한 소행을 보고 끊임없는 비판하고 지적하였다.

그가 이러한 현실비판적인 시를 짓게 된 저변의 인식은 무엇일까? 그건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무엇보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백성들에 대한 애정이 이학규의 사상에 깔려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의 부조리와 불합리성을 보고 간과할 수 없었던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소명의식 같은 것이었다. 부정한 현실에 대하여 제도적인, 정치적인 차원에서 개선할 수 없는 힘없는 문사로서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상황을 글로 비판하는 일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것이다. 그 역시 죄인의 신분으로 유배살이를 하는 처지가 아니던가?

둘째, 그가 그처럼 현실의 부조리를 목도하면서 그냥 지나쳐버리지 못한 데는 자신의 성장환경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학규는 유복자로 태어나 성호 이익의 문중인 외할아버지 이용휴와 외삼촌인 이가환 등으로부터 공부를 배운, 즉 실학적 학문 분위기의 영향이 컸었다. 이학규 역시 실학을 지향하던 문사였지만 당대 붕당정치에 희생되었다.

셋째, 이학규가 민초들의 삶에 관심을 가진 것은 자신보다 8살 위로 당시 강진에 유배되어 있던 정약용의 현실주의적 문학세계와 관련이 있다. 이학규의 처가 쪽 대학자였던 정약용과 편지를 통해 현실적 담론을 주고받았다.

이학규가 김해지역에서 20여 년간 유배살이를 하면서 민초들의 생활상을 작품화 한 것은 많다. 특히 그는 유배기간 중인 1819년에 59편 77수의 연작시인 금관기속시를 지었다. 이 시편들은 그가 김해지역 민초들의 삶을 직접 목도하고 체함하면서 작품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당시의 현실인식을 잘 보여준다.

그가 금관기속시를 지을 때인 19세기 초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혼란의 시기로 삼정(三政)이 문란해지는 등 민초들은 극도의 궁핍과 착취로 인하여 신음하던 시기였다. 삼정이란 토지세인 전정(田政), 군역을 포(布)로 받는 군정(軍政), 정부의 구휼미 제도로 사실상 고리대금업이 돼버린 환정(還政) 또는 환곡(還穀)이다.

이처럼 금관기속시에는 조선 후기 김해지역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과 농민, 염전의 일꾼, 여인 등 하층민에 대한 횡포, 당대에 대한 모순점 등을 지적한 내용이 많다. 민생의 현장에서 함께 호흡하며 경험한 생활을 시로 옮긴 것이기에 진정성과 핍진성을 가지며, 당시 사회의 모순과 병폐를 여실히 느끼게 된다.

①이학규의 시문집인 『낙하생고』 내지. 출처=규장각
이학규의 시문집인 『낙하생고』 내지. 출처=규장각

그러면 그는 어떤 일 때문에 김해로 유배되었을까?

1801년(순조 1) 4월에 천주교도 박해사건인 신유사옥이 있어났는데, 이때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인인 이승훈과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 등이 처형되고, 이학규의 외삼촌인 이가환 등은 옥사하였다. 처형된 이승훈은 이학규의 9촌 아저씨(아버지의 8촌)였다.

이학규는 천주교와는 무관함이 밝혀졌지만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전라도 능주(지금의 화순군)로 유배되었다. 이해 10월 황사영이 천주교 박해의 실상과 해결책을 비단에 적어 베이징(북경)에 있던 서양 신부에게 보내려다 발각돼 참형을 당하는 백서사건(帛書事件)이 발생한다. 이때 이학규는 황사영과 고총사촌이라는 이유로 다시 국문을 받고 화순에서 김해로 유배지를 옮기게 된 것이다. 그는 김해에서 유배살이 20여 년만인 1824년(순조 24) 4월에 해배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필사본 시문집 『낙하생고』(洛下生藁)를 포함해 흩어져 있던 그의 유고를 1985년에 수합하여 영인본으로 발간한 『낙하생전집』 3권 등이 있다.

<참고자료>
-이국진, 『낙하생 이학규의 시문학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민족문화연구 총서 150, 2017.
-이학규 지음·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옮김, 『영남악부-유배지에서 역사를 노래하다』, 겅균관대학교 출판부, 2011.
-허경진 옮김, 『낙하생 이학규 시선-한국의 한시 34』, 평민사, 1998.
-백원철, 「낙하생 이학규의 생애와 문학」, 한국한문학연구 6, 1982.
-이국진, 「이학규 시에 나타나는 현실인식과 내면의식」, 『한국한시연구』 14, 2006.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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