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내는 사람 이야기 (19)소세양과 황진이의 러브스토리

조해훈 승인 2019.08.27 18:35 | 최종 수정 2019.08.27 18:49 의견 0
-전북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에 있는 소세양 신도비.
전북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에 있는 소세양 신도비. 사진=조해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 인간에게 ‘사랑’만큼 자주 회자되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인간의 생명과 감정은 사랑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문학과 음악을 포함한 예술 분야의 작품 중에서 단연 사랑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우리는 조선시대의 유명한 기생인 황진이(생몰미상)를 기억한다. 황진이가 조선시대의 왕족으로 이름이 이종숙(1508~?)인 벽계수를 유혹하기 위해 지었다는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 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 허니 쉬어간들 어떠리”라는 시조를 남성들은 외워 술자리 등에서 여흥으로 읊기도 한다. 그녀의 사랑 대상 중에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기억되는 남성은 벽계수와 화담 서경덕(1489~1546)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문신인 임방(1640∼1724)이 지은 『시화총림』 권4에 수록된 「수촌만록」을 보면 사대부인 소세양(1486~1562)과 황진이의 러브스토리가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다. 「수촌만록」에는 여러 사람의 시를 중심으로 한 일화나 시평이 소개되어 있으며, 모두 56편의 시화가 실려 있다. 단군시대부터 조선 영조 때까지의 시와 일화를 모아 엮은 시화집인 『동국시화휘성』(권21, 황진이조)에도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실렸다.

소세양은 형조·호조·병조·이조판서를 거쳐 52세인 1537년에 우찬성, 60세인 1545년에 좌찬성을 지낼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황진이는 개성 출신으로 기생이 된 동기에 대하여 우리가 학창 시절에 들은 바로는 그녀 나이 15세 무렵에 이웃에 사는 한 총각이 황진이를 짝사랑 하다 병으로 죽자 죄책감을 느껴 기생이 되었다는 것인데, 정확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황진이가 만난 인물로는 지족노선과 개성유수 송순, 벽계수, 양곡 소세양, 화담 서경덕, 명창 이사종, 이언방 등이 있다고 한다. 황진이는 이들과의 인연을 소재로 많은 한시와 시조를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한시 8수와 시조 6수가 전하며 개인문집은 남기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기생 중에서 전북 부안의 관기였던 매창이 문집을 남긴 유일한 경우일 것이다.

황진이는 당시 송도 근교에서 수도하며 ‘살아있는 부처’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유혹하여 파계시켰다고도 한다.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에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며, 박연폭포·서경덕·황진이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였다.

그러면 소세양과 황진이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그 내용은 어땠는지 간략하게 정리를 해보겠다. 『동국시화휘성』과 「수촌만록」에 실려있는 소세양과 황진이에 관한 일화를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시화총림』.
『시화총림』

소세양은 젊었을 때 뜻이 굳세다며 뽐내고, 말끝마다 “여색에 미혹되는 자는 남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황진이의 재능과 용모가 당대 제일이어서 벽계수와 지족선사 등 여러 명사들이 그녀에게 수모를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벗들과 약속하였다. “내가 그 여인과 딱 30일만 함께 지내고 헤어질 것이며, 그 뒤에는 털끝만큼도 마음에 두지 않을 것이네. 만약 하루라도 더 매달린다면 자네들은 나를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좋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 후 어느 날 소세양은 송도로 내려갔다.

「수촌만록」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소세양이 송도에 도착해 황진이를 보니 과연 뛰어난 기생이었다. 둘은 만나서 약속대로 30일의 동거에 들어갔고 한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비록 떠나고 싶지 않을지라도 약속에 따라 다음 날이 되면 이별해야 한다. 달빛이 영롱하게 비치는 누각에 올라가 두 사람은 술을 마셨다. 황진이는 “공과 서로 이별하는데 어찌 한 마디 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변변치 못하나마 시 한 수를 올려도 될까요?”라고 청하니 소세양이 허락하였다. 곧 황진이는 곡진하게 오언율시 한 수(「판서 소세양과의 이별에 부침 奉別蘇判書世讓」)를 읊었다.

달빛 어린 뜨락에 오동잎 다 지고 月下庭梧盡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물들었네. 霜中野菊黃
누대는 높아 한 자만 더 오르면 하늘인데 樓高天一尺
사람은 취해서 천 잔의 술을 마셨네. 人醉酒千觴
물소리는 거문고에 차갑게 스며들고 流水和琴冷
매화의 높은 향기 피리소리에 휘감기네. 梅花入笛香
내일 아침 우리 서로 헤어진 뒤에는 明朝相別後
사무치는 정 푸른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情與碧波長

-『歷代女流漢詩文選』·『海東詩選』에 수록

일곱 살 때부터 시를 지었다는 소세양은 황진이가 마음을 담아 지은 이 시를 듣고 그만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면서, 그대로 며칠 더 머물렀다고 한다.

어느새 소세양을 사랑하게 된 황진이는 그를 떠나보내기 싫어서 “사무치는 정 푸른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라고 노래했다. 이처럼 소세양은 황진이의 마음에 감동하여, 애초에 먹은 마음을 꺾고 자신이 비정한 사람이라 탄식하면서 다시 그녀 곁에 머물렀다.

그 이후에도 황진이는 소세양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못하고 종종 인편을 통해 그리움이 가득한 시를 보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벗들은 약속을 어긴 소세양을 “인간이 아니다”라고 조롱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러 자료를 참조하면 소세양과 황진이의 만남에 대해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두 사람이 만난 계기에 대해서도 「수촌만록」과 『동국시화휘성』의 기록은 조금 다르다.

세상에는 꼭 팩트(사실)가 명확하지 않더라도 전설 내지는 설화도 나름대로의 중요한 의미를 지녀 사람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준다. 물론 진실을 가려야 하는 역사적인 사실일 경우는 다르지만 말이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참고자료>

-황진이·장미리, 『너는 사랑이라 말하지만 나는 그리움이라 말한다』, 수선재, 2012.
-고정희, 『시조, 서정시로 새기다』, 도서출판 아시아. 2019.
-홍석영, 「양고 소세양 고: 그의 생애와 문학」 『문리연구』 1, 1983.
-이화영, 「황진이의 예능과 인격의 융합」, 『시조학논총』 50, 2019.
-심주정, 「양곡 소세양의 신월시와 황진이의 반월시 고찰」, 『논문집』 3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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