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 이야기 (25)정구의 『봉산욕행록』을 통해 본 동래 온천 나들이

조해훈 승인 2019.11.13 09:12 | 최종 수정 2019.11.13 14:04 의견 0
②정구가 경남 함안 군수로 재임시 편찬한 『함주지』(함안박물관 소장).
정구가 경남 함안 군수로 재임시 편찬한 『함주지』(함안박물관 소장).

경북 성주 출신으로 호가 한강(寒岡)인 정구(鄭逑·1543~1620년)는 조선시대에 과거를 하지 않았지만 드물게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 강원도관찰사·형조참판·대사헌 등의 고위 관직을 지낸 문사이다. 정구는 1563년에 퇴계 이황을, 1566년에 남명 조식을 찾아 뵈어 우리나라 성리학의 두 거봉을 스승으로 삼은 인물이다.

그의 또 하나의 특징적인 것은 읍지(邑誌)에 관심이 많아 여러 읍지를 편찬해 후대의 행정과 지방의 문물과 역사 등에 도움을 주고 있다. 정구의 읍지에 대한 관심은 1580년에 경남 창녕현감이 되어 『창산지』(昌山誌)』를 편찬한 것을 필두로 『통천지』·『임영지』·『동복지』·『관동지』 등 7종의 읍지를 간행했다. 이는 그가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지역마다 읍지를 간행했음을 보여주는데, 현존하는 것은 당시 경남 함안지역의 『함주지』(咸州志) 하나뿐이다.

정구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이만 줄이고, 그의 동래온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다음과 같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그는 1617년 떠들썩하게(?) 동래온천 나들이를 했다. 그의 온천행은 당대 큰 화젯거리로 소문은 낙동강을 따라 영남지역 곳곳에 퍼져나갔다. 온천행은 한강이 세상을 버리기 3년 전인 75세 때에 제자들과 함께 행해졌는데, 1617년 7월 20일부터 그해 9월 4일까지 45일간 이루어졌다.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은 정구의 제자 이윤우가 정구의 동래 온천욕을 동행하면서 적은 일기를 1912년 정재기(鄭在夔·1851~1919)가 목판본 1책으로 다시 간행한 것이다. 이 책에는 한강의 온천욕과 관련해 목욕방법과 횟수, 건강상태, 복용약제, 방문한 사람, 보내온 물품까지 상세히 기록돼 있다.

정구의 온천 나들이가 화제를 모은 것은 무엇보다 그 행사에 수많은 사람들이 관여되었다는 점이다. 그 책에 거론된 인물이 무려 300명가량이나 된다. 그 사람들은 정구를 비롯해 그의 문인들, 경상감사 및 지나는 지역의 지방관, 영접차 내방한 문사들, 동래 읍민 등을 합친 수치이다. 이 명단 가운데 한강 문인은 동행 및 내방을 합쳐 80명가량 된다.

정구의 문하인 손처눌과 곽근, 이후경 등 8명이 온천 나들이를 기획·추진하였다. 한강의 행차는 영남 유림계의 핫 뉴스였다. 지금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지만 조선 중기에 지방에 거처하는 한 문사가 이 정도의 인원을 동원(?)하면서 그것도 70대의 고령으로 온천 나들이를 한 경우는 사례가 거의 없었다. 제자들을 대동해 견여(肩輿)라는 가마를 타고 나들이 하는 모습은 비록 정승일지라도 감히 행하지 못하는 장관이었던 것이다.

필자 소장의 『한강선생봉산욕행록』.
필자 소장의 『한강선생봉산욕행록』.

그러면 정구의 나들이 과정을 간략히 구성해 보기로 하겠다.

정구 일행은 1617년 7월 20일 새벽 경북 칠곡의 지암(枝巖)나루에서 배로 출발했다. 지암에서 하빈-현풍-고령-창녕-함안-영산-밀양-김해-양산을 거쳐 7월 26일 목적지인 동래 온천에 도착했다. 정구는 온천에서 꼬박 30일을 체류한 뒤 8월 26일 동래를 떠나 올 때와는 다른 경로인 양산-통도사-경주-영천-하양-경산을 거쳐 9월 4일 칠곡의 사수(泗水)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면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나들이를 감행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낙동강 연안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던 정구의 학맥인 한강학파의 결속을 재확인하고, 새로운 문인들을 규합해가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한강이 온천 나들이를 통해 자신의 문인 가운데 25%와 회합을 가졌다. 이는 이 지역(칠곡·대구·현풍·고령·창녕·함안·영산·밀양·김해 등) 문인 209명 가운데 약 40%가 수행 또는 내알했음을 뜻한다. 따라서 전후 45일에 걸친 정구의 온천 나들이는 영남 유림들이 회합한 일대 사건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말 그대로 고령에 따른 신병치료로 볼 수 있다. 정구는 온천행을 떠나기 2년 전에 중풍(風痺·풍비)을 만나 오른쪽 반신이 불편했다. 그는 이를 치료하기 위해 여러 약과 침을 써보았으나 그다지 효험이 없던 차였다. 그러던 중 스승의 병을 안타까워한 제자들이 동래온천의 효험을 전해 듣고 온천 나들이를 논의했던 것이다.

정구는 이언적·이황·김굉필·정여창과 함께 영남 5현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으며, 『역대기년』·『고금충모』·『치란제요』 등을 저술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방대한 서적을 간행할 정도로 학업과 학맥이 탄탄했다.

<참고자료>
-남명학연구원(2011), 『한강 정구』, 예문서원.
-정우락 등(2017), 『한강 정구의 삶과 사상』, 계명대학교 출판부.
-김학수(2015), 「이천배(李天培), 천봉(天封)의 한강학(寒岡學) 계승과 한강학파(寒岡學派)에서의 역할과 위상」, 『영남학』 28.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김학수(2010), 「조선중기 寒岡學派의 등장과 전개 : 門人錄을 중심으로」, 『한국학논집』 40,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한영미(2012), 「『蓬山浴行錄』 연구」, 경북대학교대학원 한문학과 석사논문.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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