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1637~1692)은 1692년(숙종 18) 경남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벽련마을 앞에 있는 섬인 노도에 유배돼 그곳에서 5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필자는 2년 전에 김만중의 유배와 관련된 글을 쓰기 위해 노도에 가 그가 위리안치 됐던 (복원된)초옥의 쪽마루에 앉아 한참 동안 바다를 보면서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조선조 예학(禮學)의 대가인 김장생의 증손인 그는 고전소설인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집안은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권문세도가이며, 서인(西人)의 적통을 잇고 있다. 그는 또한 광성부원군 김만기(1633∼1687)의 아우로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의 숙부가 된다.
김만중의 어머니는 해남부원군 윤두수의 4대손이다.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 윤방의 증손녀이고, 이조참판 윤지의 딸인 해평 윤씨다. 시집 간 지 오래지 않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편 김인겸(1614~1637)은 강화도로 내려가 성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남편은 강화성을 지키다 함락되자 굴욕을 참지 못하고 분신으로 생을 마감한다. 시어머니 서 씨는 아들이 죽자 역시 죽음을 택했다. 당시 김만중은 어머니 배속에 있었고, 형인 만기는 다섯 살이었다.
김만중은 유복자로 태어나 형과 함께 외가에서 어머니의 훈도를 받고 자랐다. 14세인 1650년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6세인 1652년에 진사에 일등으로 합격했다. 그 뒤 1665년(현종 6) 정시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갔다. 그러다 1675년(숙종 1) 동부승지로 있을 때 인선대비의 상복문제로 서인이 패배하자 관작을 삭탈 당했다.
1686년에는 대제학이 됐으나 1687년에 숙종의 후궁인 장 씨 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 사건에 연루돼 그해 9월 평안도 선천으로 유배됐다. 1689년 1월에 숙종은 장 씨가 낳은 왕자인 이윤을 세자로 봉하고, 그녀를 희빈으로 승격했다. 이 때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이 왕자를 세자로 봉하는 것이 시기상조라 해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도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 도중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당시 서인의 다른 세력가들도 파직 또는 유배를 면하지 못했다.
1688년 11월에 김만중은 선천에서 풀려났으나 서인이었으므로 석 달 만인 1689년 3월에 다시 남해 노도에 유배됐다. 그해 12월 25일에 어머니가 73년의 세상살이를 마치고 돌아갔다. 그 소식을 서포는 이듬해 초에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모친의 행장을 지었고, 1692년 4월 30일에 마침내 노도에서 굴곡 많은 생을 버리고 말았다. 강화도에서 나오는 배 위에서 태어난 그는 그렇게 절해고도에서 삶을 끝맺었다.
김만중은 효성이 지극한 만고의 효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도 그가 옛이야기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귀양살이할 때 지었다. 대제학·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이재(1680~1746)는 『삼관기(三官記)』에서 “효성이 지극했던 김만중이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구운몽』을 지었다”고 밝혔다.
구운몽은 김만중이 적소인 선천에서 어머니를 위로할 목적으로 창작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그가 살면서 경험한 세상에 대한 깨달음의 결정체이기도 했다. 삶이란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덧없고 부질없으며, 한바탕 백일몽처럼 어지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김만중이 정시문과에 급제해 입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운몽에서 불교적 인생관으로 팔선녀의 꿈을 그린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이 작품의 간략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인 성진은 육관 대사의 제자였는데, 8선녀를 희롱한 죄로 양소유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인간 세상에 유배되어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8선녀의 후신인 8명의 여자들과 차례로 만나 아내로 삼고 영화를 누리며 지내다가 이후 인생무상을 느끼고 큰 깨달음을 얻어 불교에 귀의한다는 불교적인 인생관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구운몽은 후대 소설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옥루몽』·『옥련몽(玉蓮夢)』 등은 이 구운몽을 토대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구운몽은 다른 소설에 비해 새로운 형식의 작품으로 한국 고대소설 문학사에 있어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남해 노도는 김만중이 3년간 어머니에 대한 극진한 그리움으로 애달파 하고 장희빈에게 빠져 중전인 인현왕후 민 씨를 내쫓은 숙종의 어두운 처사를 풍간(諷諫)하면서 어지러운 나라를 걱정하는 사씨남정기를 쓰던 마지막 유배지였다.
인현왕후 민 씨는 숙종의 계비로, 기사환국(1689년 남인이 장희빈의 소생인 원자의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일) 때 폐서인이 되었다가 갑술옥사(1694년 서인들이 전개하던 폐비 민 씨 복위 운동을 반대하던 남인이 화를 입어 권력에서 물러나고 서인이 집권한 사건)로 다시 왕후로 복위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해 궁녀가 쓴 소설 『인현왕후전』이 전해진다.
사씨남정기는 사대부가의 처첩갈등을 중심축으로 해 당쟁하의 정치적 갈등도 함께 문제 삼고 있다. 당대의 장희빈 사건과 유사해 숙종이 인현왕후를 퇴출하고, 그 대신 왕자를 낳게 된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한 것을 우회적으로 그린 풍자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시대의 당쟁은 이처럼 많은 인재들을 유배 보내고 죽게 만드는 되풀이를 수없이 했다. 그때보다 진화된(?) 당쟁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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