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 (16)비 내리는 날 아침 산책

조해훈 승인 2019.02.28 20:05 | 최종 수정 2019.02.28 20:20 의견 0
①내 집에서 국사암으로 올라가는 길 옆에 매화가 피어 있다.
목압마을 집에서 국사암으로 올라가는 길 옆에 매화가 피어 있다. 

아침, 현관문을 여니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지금 오는 건 분명 봄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준 후 왼손으로 우산을 쓰고, 오른손으론 스틱을 짚고 집을 나섰다. 오전 7시반쯤이었다.

마을에는 운무가 엷게 깔렸고, 몇 집의 굴뚝에선 장작불을 지피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요즘 몸에 힘이 많이 빠지는 등 기운이 없어 지팡이를 짚었는데도 국사암으로 올라가는 길이 힘들다. 곳곳에 매화가 피었거나 피고 있다. 나는 매화를 좋아한다. 꽃이 화려하지 않을 뿐더러 꽃내음이 은은하지만 오래간다. 내 성정과도 닮았다면 너무 속이 보이는 것일까? 햇쑥도 보인다.

저 앞 산의 내 차밭에도 비가 내려 운무가 끼어있지만 깨끗하면서도 고요한 느낌이다. 국사암에 들어가 물부터 한 잔 마셨다. 암자에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홍매가 아름답게 피어 있다. 뒤로 나가 진감국사가 심었다는 1,200년 된 느티나무인 사천왕수를 보며 길을 걸었다. 누런 솔잎과 도토리나무 이파리가 오솔길에 깔려 비를 맞는다. 이 오솔길을 걷다보면 언제나 그렇지만 마치 선정(禪靜)에 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③당나라 유학승인 진감국사가 수행하다 입적한 국사암 경내.
당나라 유학승인 진감국사가 수행하다 입적한 국사암 경내.

왼쪽으로 올라가면 불일폭포,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쌍계사인 갈림길에 다달았다. 마음은 불일폭포로 가고 싶지만 몸이 허락하지 않아 쌍계사로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최근에 쌍계사로 내려가는 가파른 길에 나무데크를 깔아 한결 수월하지만 그래도 조심스럽다.

④국사암에서 불일폭포와 쌍계사 방향의 갈림길이 있는 곳으로 나 있는 오솔길.
국사암에서 불일폭포와 쌍계사 방향의 갈림길이 있는 곳으로 나 있는 오솔길.

드디어 금당(金堂) 앞까지 왔다. 동안거가 끝나 금당으로 들어가는 게 허락되었다. 음력 1월 15일인 지난 2일 동안거가 해제되었다. 동안거는 음력 10월 보름부터 정월 보름까지 스님들이 선방에서 수행을 하는 기간이다. 하안거는 4월 보름부터 7월 보름까지이다. 안거란 스님들이 외부와의 출입을 끊고 선방에서 참선수행에 몰두하는 수행방법을 일컫는다.

오도문(悟道門)으로 들어가면 바로 청학루를 만난다. 이 누각 옆을 돌아 108계간을 올라가야 금당에 이를 수 있다. 금당의 좌우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문이 잠겨 있어 안은 들여다 볼 수 없다. 여러 차례 7층석탑이 법당 가운데 모셔져 있는 걸 본 터라 굳이 보지 않아도 알고 있다. 금당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다 내려온다. 집을 나서 여태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는데, 금당 아래 건물인 팔상전에 공양주 보살인가, 한 아주머니가 우산을 옆에 접어두고 들어간다.

오도문을 나와 쌍계사로 내려가 북과 목어가 있는 법고전을 보고 있으니 아버지와 아들인지 남자 두 명이 걸어온다. 그들은 진감선사비를 알지 못하는지 비 옆으로 해서 대웅전으로 바로 올라간다. 아무리 봐도 신기할 따름인 진감선사비문을 한참동안 서서 보다가 돌아선다.

진감선사비문 안내판 옆에 있는 돌거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한 잔 마셨다. 국사암의 물보다 차가웠다.

고운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지었다는 진감선사 비문.
고운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지었다는 진감선사 비문.

절 아래로 내려왔다. 쌍계사매표소에 있는 오래된 다리의 안전성에 문제가 있는지 철거하고 새로 짓느라 계곡쪽에 계속 공사를 하고 있다. 원래의 다리 옆에 임시다리를 설치해 사람이든 차량이든 그곳을 통해 다니고 있다. 쌍계초등학교 입구에 배수로 공사를 하느라 플라스틱으로 된 관을 쇠로 만든 관으로 교체하고 있다.

마을 첫집인 관아수제차의 아저씨가 한말짜리 통에 든 고로쇠물을 작은 통으로 옮기고 있다. 집에 들어오니 고양이들이 아침을 먹어 배가 부른지 현관 앞에서 몸을 긁으며 놀고 있다. 길고양이인 노랭이와 점순이, 멀건이, 반점이가 이제는 집고양이처럼 천진스럽게 내 집에 살고 있는 것이다. 잘 걷는 사람은 30분도 채 걸리지 않을 거리를 나는 1시간 반 만에 걸었다.

비 내리는 아침에 이렇게 천천히 걷고 나니 마음에 안개처럼 쌓이고 가려져 있던 게 조금은 희발된 기분이다.

②내 집에서 국사암으로 올라가는 길에 햇쑥이 올라와 있다.
내 집에서 국사암으로 올라가는 길에 햇쑥이 올라와 있다.

<역사한문학자·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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