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 (21)고마운 목압서사 방문객들

조해훈 승인 2019.05.26 13:29 | 최종 수정 2019.05.26 13:56 의견 0
목압서사에서 이틀간 숙식을 한 19세 미국인 코웰(오른쪽)과 필자가 25일 오후 1시반에 국사암에서 헤어지기 직전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는 불일폭포를 거쳐 천왕봉으로 간다며 떠났다.
목압서사에서 이틀간 숙식을 한 19세 미국인 코웰(오른쪽)과 필자가 25일 오후 1시반에 국사암에서 헤어지기 직전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는 불일폭포를 거쳐 천왕봉으로 간다며 떠났다.

25일 오후 1시반. 필자의 집 위에 있는 국사암이다. 여기서 방금 코웰이 불일폭포로 떠났다. 19세로 오는 10월 대학에 입학한다는 그는 미국 워싱턴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사는 미국인이다. 코웰은 불일폭포에 들렀다 지리산 삼신봉과 세석평전을 거쳐 천왕봉에 갈 계획이다.

그는 다음달 8일 인천공항에서 미국으로 떠난다. 필자는 천왕봉에 간다는 그가 걱정이 돼 A4 용지에 ‘이 학생은 19세의 미국인입니다. 한국을 여행 중이므로 여러 편리를 봐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라는 글을 적어주고, “도움이 필요하면 만나는 사람에게 이 종이를 보여줘라”고 당부를 했다. 그는 핸드폰이 없다. 필자는 그 종이에 핸드폰 번호와 집 주소 등을 함께 적어두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곤 “미국 집에 도착하면 별일 없었는지 나에게 이메일을 보내라”고 했다.

코웰은 키가 무려 196cm로, 너무 착하고 순수하다. 그는 3개월의 일정으로 먼저 일본에 들러 두 달간 여행을 한 후 후쿠오카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와 이 화개골로 왔다. 코웰은 일종의 무전여행(?)을 하고 있었다. 여행 중에 일거리가 있으면 일을 해주고 돈을 받아 교통비 등을 마련한다고 했다. “대학 등록금도 스스로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등록금이 상대적으로 싼 슬로베니아에 있는 대학에서 공부한 후 일본이나 한국에서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다”고 했다. 참으로 대견한 학생이었다.

지난 1월 27일 폴란드 청년(왼쪽)이 목압서사에서 묵으며 지내는 가운데 역시 목압서사를 방문한 신라대 엄경흠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다.
지난 1월 목압서사에서 며칠 묵으며 지내던 폴란드 청년(왼쪽)이 방문한 신라대 엄경흠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그는 ‘선’(仙)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일본의 선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었다. 코웰은 어찌어찌하여 필자가 운영하는 목압서사에 온 것이다. 화개골에 오는 외국의 젊은이들은 대개 무전여행(?)을 했다. 우리나라 학생들과는 여행에 대한 생각이나 경향이 달랐다. 목압서사에 와 숙식을 하고 떠난 그런 청년들이 몇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우리 젊은이들이 대체로 유명한 곳을 찾는 여행 패턴과는 달리 테마 여행을 하는 편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외국의 청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외국 청년들은 지리산에 경외심을 갖고 특히 화개골의 차를 아주 신비롭게 여겼다. 그런 청년들이 화개골의 하동야생차 박물관 관계자나 화개골 주민들로부터 목압서사를 듣고 찾아온다.

그들이 목압서사에 큰 관심을 갖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 것 같았다. 하나는 이 공간의 고서박물관에 전시 중인 고서(古書)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대개 100~500년 전에 목판본으로 제작된 한국의 고서를 그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그들에게 고서를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면 너무 신기해 한다. 그리곤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둘째는 목압서사에서 역사와 한문, 한시 등 현재 한국의 교육방법과는 다른 이전 시기의 텍스트와 내용으로 주민들이 공부를 한다는 데 흥미를 느낀다는 점이다. 또한 목압서사의 아래 채는 규모가 작고 그다지 오래된 건물은 아니지만 기와를 얹은 한옥 스타일이어서 보고싶어 한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질문은 끝이 없다. 모든 게 특이하고 여느 한국 여행지에서는 보기 힘든 자료와 분위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장성한 미혼의 아들 둘이 있어 무전여행을 하는 이들 젊은이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한다. 그들은 돈을 절약하기 위해 계절에 관계없이 야외의 텐트에서 잠을 잔다. 코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틀을 자고 갔다. 2박3일간 필자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러다보니 아들처럼 여겨져 그와 헤어질 땐 안쓰러워 눈물까지 났다.

미국와 영국, 싱가포르 등의 부부 여행객들도 다녀갔지만 필자가 더 애정이 가는 외국 방문객들은 아무래도 무전여행을 하는 청년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러한 여행 경험과 그것으로부터 쌓는 지식들로 앞으로 이 세상을 보다 밝게 미래지향적으로 만들어갈 인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다지 부국이 아닌 나라의 청년들 여러 명도 숙식을 하고 갔다.

필자는 목압서사를 찾는 외국 방문객이든 한국 방문객이든 방문록을 쓰게 하거나 먼저 사진을 촬영하지 않는다. 사진을 함께 찍자고 하거나 찍어달라고 할 경우에 그렇게 한다.

지난 달 6일 필자가 운영하는 목압서사를 방문한 부산의 시인들이 서사 입구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난달 6일 필자가 운영하는 목압서사를 방문한 부산의 시인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올해만 해도 목압서사를 찾은 내외국인 방문객은 100명이 넘는다. 물론 인근 주민들은 제외한 숫자이다. 이를테면 부산에서 시인들 20여 명이 얼마 전에 관광버스로 찾아왔고, 며칠 전에는 부산의 모 대학 교수님들 10명이 방문했다. 그리고 몇 명 또는 한 두명이 찾아온 경우는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그러다보니 매일 손님이 찾어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두 세 팀이 겹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 번 왔던 분이 다시 여러 차례 오거나 지인들과 함께 방문하기도 한다.

필자는 ‘목압서사를 방문하는 분들께 늘 감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건 멀리서 필자를 보기 위해, 그리고 목압서사에서 다른 공간에서는 만날 수 없는 오래된 책과 신선적인(필자의 집 위쪽에 고려와 조선 시기의 문사들이 청학동으로 인식했던 불일폭포가 있음) 분위기 등을 느끼기 위해 일부러 찾기 때문이다. 더불어 필자는 목압서사의 공간이 좁아 방문객들에게 늘 미안한 생각을 갖고 있다. 산골의 농가를 인수해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내부 공간이 아주 협소한 탓이다.

지난 20일 부산 소재 대학 교수님들이 목압서사를 방문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난 20일 부산 지역 대학 교수님들이 목압서사를 방문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방문객들에게 화개골의 역사와 문화, 전설, 설화, 이곳의 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준다. 대부분 도시에서 온 방문객들은 도시에서 느낄 수 없었던 이곳의 느린 삶과 아름다운 산수에 대해 정신적 위안을 갖는다. 어떤 분들은 필자에게 “손님들 많이 오면 귀찮지 않느냐”고 묻기도 한다. 필자는 “이 골짝까지 찾아주니 오히려 감사하다. 손님들이 나에게 삶의 건강성을 가져다 준다”고 대답한다.

<역사한문학자·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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