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 (25)목압서사에서 띄우는 편지①
조해훈
승인
2019.06.12 08:51 | 최종 수정 2019.06.12 09:08
의견
0
제가 사는 화개골에 이틀 내내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날씨가 맑았다 흐렸다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곳 목압서사(경남 하동군 화개면 맥전길4)에 살고 있는 길고양이인 노랭이와 반점이, 멀거이, 점순이가 마당에서 햇볕을 쬐며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졸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앞에 나비라도 어른거리면 발톱을 세우고 휙휙 덮칠 듯이 공격합니다.
대문 입구에 꽃무더기로 피었던 빨간 장미들이 잎을 말아 고개를 숙이고 있고, 대문 안쪽 화단엔 카네이션의 꽃송이들이 매일 번갈아가며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 옆의 못 생긴 석류나무에도 엷은 주황색 꽃들이 몇 개 달려있습니다. 목압서사에는 보이는 것과는 달리 알아들을 수 없는 식물의 언어들이 온 공간에 떠다닌답니다. 명색이 시인이라면서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다 알아듣지 못하고, 그들이 송신하는 부호들을 풀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문 안쪽 돌담장엔 불두꽃(?)을 피우기 위해 잎을 단 줄기가 하루가 다르게 숨가쁘게 기어오르고 있습니다. 마당엔 틈날 때마다 풀을 뽑아내지만 금방 금방 올라오고 있답니다. 여기 사람들은 “풀은 사람 발을 따라 온다”고 합니다. 그 말은 풀을 뽑고 뒤돌아보면 또 자라있다는 뜻이지요. 모진 생명력을 가진 잡초의 본능이겠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긴 끈 같은 고통과 슬픔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날 마당에서 재미없는 오언절구 한 수를 읊어봅니다.
初夏木鴨書舍
霞霧山風溫
花開川水寒
旵場平和宂
著思愍憂忓
초여름의 목압서사
하무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따뜻하고
화개천에 흐르는 물은 차갑네.
마당에 비치는 햇살은 평화롭고 한가로운데
마음에 달라붙는 것은 근심이고 어수선하다네.
한시를 지으니 평소에는 엎드려 숨어있는 제 마음이 드러났군요. 부산에 살 때와는 또 다른 근심이 많은 데 그게 나타난 것입니다. 사는 곳마다 또 다른 세상이 있는 것이지요. 아름답고 따뜻했던 어느 날들만 기억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제 나이가 되면 세상에서 새삼스런 일은 그다지 많지 않지요. 그래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닥치면 겁 많고 사회성이 없는 저는 당황하고 헤맨답니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동네 처마 밑을 돌며 고민만 하다 그 문제를 해결할 시간을 놓치는 어리석은 짓만 반복하지요.
햇살이 느릿느릿하게 드는 ‘녹차작업장’에는 며칠 전까지 거의 매일 밤을 새다시피하며 차를 만들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바닥을 쓸어내고 차솥 주변을 정리를 했다고는 하나 곳곳에 차를 덖을 때, 건조시키기 위해 큰 소쿠리에 담을 때 흘린 차들이 보란 듯이 흩어져 있습니다. 큰 소쿠리들도 차솥 위, 비비는 멍석 위에 그대로 있습니다. 맨손으로 찻잎을 비빌 때 손바닥에 묻어나는 찻잎의 향이 혼곤한 제 몸과 의식에서 스멀스멀 나오는 것 같아 아이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차를 만들 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불청객들이 제다를 하지 않자 작업장에 보금자리를 틀었군요. 이 년 전 봄에 작업장에서 태어나 목압서사를 떠나지 않고 살고 있는 노랭이가 지난 해 첫 새끼를 다섯 마리나 순산했는데, 최근에 또 새끼를 낳은 것입니다. 작업장 문을 열자 새끼 고양이들이 놀라 후다닥 작업장에 있는 잡동사니 짐들 속으로 숨는군요. 도망가기 전에 그 녀석들도 놀랐는지 뒤돌아보는 자그마한 눈망울들이 얼마나 예쁜지 순간적으로 제 가슴 속이 환하게 밝아지는 걸 느꼈습니다. 새끼는 네 마리인데 노랭이를 닮은 누런 고양이 세 마리, 얼룩이 한 마리입니다. 그 놈들의 애비가 누구인지 짐작이 갑니다. 반점이 입니다. 삶은 이처럼 기쁨과 슬픔의 파편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손바닥만 한 텃밭에는 온갖 야채가 다 자라고 있습니다. 제가 심고 가꾸는 공간입니다. 우선 텃밭에 심은 야채 종류를 보자면 상추·쑥갓·부추·깻잎·쪽파·대파·머위·딸기·당근·당귀·더덕·고사리·고추·가지·고추·토마토·돈내이(?) 등입니다. 종류만 많았지 야채의 양이 많은 건 아닙니다. 지난봄에 일교차가 너무 큰 탓에 많이 얼어죽은 것이지요.
수돗가에는 매실나무가 치렁치렁 머리를 풀고 있습니다. 나무에 벌레가 득실거려 재작년에 가지를 좀 잘랐는데, 어느 새 또 가지를 키워 바람에 건들거리는 것이지요. 지난여름엔 무척 더웠습니다. 올해도 상당히 더울 것이라고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그럴 땐 아래채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지나는 사람과 차량들을 하염없이 바라볼 참입니다. 또한 조는 듯이 나지막하게 수그려있는 마을의 지붕들도 보면서 그 각자의 사연들을 읽어볼 생각입니다.
<역사·고전인문학자·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