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 (14)하동의 문학관 순례

조해훈 승인 2018.11.17 23:26 | 최종 수정 2018.11.17 23:48 의견 0
경남 하동군 북천면에 있는 소설가 이병주문학관 전시 공간이다.
경남 하동군 북천면에 있는 소설가 이병주문학관의 전시 공간.

하동의 이병주, 정공채‧정두채, 박경리문학관 3곳 순례

필자의 고향 벗이자 같은 화개골에 살고 있는 만당(萬堂) 최한익 산새소리펜션 사장과 그의 친구인 만공(滿空) 정 모씨 등 4명이 15일 오후 하동군에 있는 문학관 순례를 했다.

화개골 정금리 도심마을에 있는 산새소리펜션에서 출발해 먼저 북천면에 소재한 소설가 이병주 문학관을 찾았다. 접근성이 좋지 못한 탓인지 방문객이 아무도 없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문학관 마당에 들어서니 왼쪽에 이병주(1921~1992) 선생의 흉상이 있었다. 오른쪽에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그의 형상이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어야 했다. 오른쪽 벽의 ‘기억 속의 명문장’ 코너에 ‘이병주 소설 어록’이 열거되어 있었다. 『지리산』‧『관부연락선』 등 그의 작품집에서 발췌한 문장들이다. 어록 벽을 돌면 한복차림으로 책상에서 원고를 쓰고 있는 그의 밀랍인형이 생전 모습으로 유리벽 안에 들어 있다.

왼쪽 벽에는 그에 대한 약력이 있다.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일본 메이지대학 전문부 문예과를 졸업한 후 1944년 와세다대학 불문과 재학 중 학병으로 동원되었으며, 진주농과대학과 해인대학 교수를 지냈고, 국제신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언론인 활동을 한 것으로 적혀 있다. 또 1961년 5‧16 필화사건으로 복역하다 2년 7개월 후에 출감해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강의했다. 1965년 마흔 네 살의 나이에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세대』에 발표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선 선생은 타계할 때까지 27년 동안 80여 권의 작품을 남기는 초인적 작가로서의 역량을 보였다고 적혀 있었다.

공간 가운데는 만년필 형의 대형 펜이 조형물로 놓여있고 그 주변에는 그의 대하소설들이 주제별로 케이스 안에 진열돼 있다.

그 뒤에는 ‘새로운 매혹의 세계-초기 단편들의 성격’‧‘민족적 좌절의 기록-『관부연락선』(1968) 등 그의 작품들을 분석한 패널들이 부착돼 있다.

이병주 선생은 필자가 근무한 국제신문의 대선배이지만 필자가 입사했을 때는 신문사를 훨씬 이전에 떠나 서울에서 말년을 보내고 계셨다.

문학관을 그냥 떠나기가 섭섭해 카페라도 있으면 커피를 한 잔 하며 시간을 지체하고 싶었지만 물어볼 사람도 없어 그냥 나왔다.

하동군 고전면에 있는 정공채‧정두수 기념관 전경이다.
하동군 고전면에 있는 정공채‧정두수 기념관 전경.

이제 고전면 배드리에 있는 ‘정공채‧정두수 기념관’으로 향했다. 기념관은 고전배드리장터문화관 2층에 있었다. 1층은 식당인데 된장찌개가 맛 있어 여기서 두 세 번 점심식사를 한 적이 있다.

건물 입구에 ‘정공채 시인’과 ‘정두수 작사가‧시인’ 약력 팻말이 각각 세워져 있다. 2층 기념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 ‘하동의 대중문화예술인’ 주제로 동편제 명창 유성준, 동편제 명창 이선유, 통기타 음유시인 이필원의 사진이 부착돼 있다.

전시공간에 들어서면 방명록이 있다. 이곳을 찾는 방문객이 워낙 적어 필자는 이전에 두 번이나 일부러 방명록에 사인을 했다. 방명록이 놓인 곳을 기준으로 오른쪽이 형인 정공채 시인, 왼쪽이 동생인 정두수 선생의 기념관이다.

정공채 시인 기념관 공간에는 평소 그가 쓰던 문필구와 각종 사진, 그의 시집들이 진열돼 있다. 벽면에 붙어 있는 그의 이력을 보면 1934년 12월 22일 경남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에서 출생하여 진주농고를 거쳐 1957년에 연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1958년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후 『정공채 시집 있읍니까』‧『해점』 등 여러 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시인이자 작사가인 정두수 선생의 기념 공간에 선 필자.
시인이자 작사가인 정두수 선생의 기념 공간에 선 필자.

전시장에는 그가 쓴 시원고와 각종 사진들 등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었다.

옆의 정두수 전시공간에 들어서니 노래가 울려나왔다. 그가 작사한 노래들이었다. 벽면에는 작사가인 그가 KBS 건전가요 가사 공모에서 ‘즐거운 여름’이 당선돼 전속 작사가로 데뷔해 1963년 진송남의 ‘덕수궁 돌담길’이 주목을 받으면서 레코드 회사와 전속 계약, 본격적인 작사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적혀 있었다.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정두수는 작사가의 길로 들어서기 전인 1961년 국가재건운동본부에서 공모한 문예작품에서 시 「공장」이 당선돼 시인으로서 활동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미자‧패티김‧남진‧나훈아‧배호‧하춘화‧조용필‧설운도 등 최고의 가수들이 그의 노랫말을 불러 인기를 모았고, 그가 작사한 노래만도 무려 3500곡이 넘는다고 했다. 그 공간에서 그의 히트작들을 다양하게 감상하면서 유명가수들과 함께 찍은 여러 사진들을 둘러보았다.

박경리문학관 내부 벽에 전시된 소설 「토지」 등장인물들.
박경리문학관 내부 벽에 전시된 소설 「토지」 등장인물들.

더 머물고 싶은 기분을 뿌리치고 악양 최참판댁 옆에 있는 박경리문학관으로 향했다. 문학관 마당에 들어서니 박경리 선생의 미니어처가 서 있었다. 한옥으로 된 문학 공간으로 들어섰다. 공간 오른쪽 벽면에 그의 작품 「토지」에 등장하는 대표적 인물들이 마치 기념사진처럼 캐리커처로 크게 묘사돼 있었다.

진열장 안에는 박경리 선생의 앨범을 비롯해 생전에 사용하던 다양한 물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필자는 강원도 원주에 있는 토지문학관을 두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그가 말년을 원주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의 문학관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악양의 박경리문학관에는 토지문학관에 없는 그의 1차 자료들이 많았다. 또한 생전에 그의 TV 인터뷰 육성이 울려나오는 화면도 있었다.

어둑해지기 전에 문학관을 나왔다. 매표소 쪽으로 걸어 내려오니 그의 소설 「토지」 제Ⅲ부 1권 24에 나오는 표현이 생각났다. ‘찬방 놋화로 위에서 약이 끓고 있었다. 방안에 가득 찬 약 냄새와 화로의 열기가 싫지 않는 계절, 시월이 가고 십일월도 중반기에 접어들었다. 찬방에는 집기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 ...’

지금과 같은 계절에 묘사된 내용이다.

우리 일행은 화개장터 쪽으로 와 면사무소 옆에 있는 옛날돼지국밥집에서 돼지머리국밥을 한 그릇씩 먹었다. 다 먹고 나니 사장님이 여느 때처럼 발효차를 우려 주셨다.

소설가 이병주 선생의 작품집들과 정공채 시인의 작품집들, 박경리 선생의 작품집들이 필자가 운영하는 목압문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소설가 이병주 선생의 작품집들과 정공채 시인의 작품집들, 박경리 선생의 작품집들이 필자가 운영하는 목압문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한편 필자가 운영하고 있는 목압문학박물관에는 ‘하동의 시인과 작가들’ 주제로 하동 출신의 시인과 소설가들의 작품집이 전시돼 있다. 오늘 방문한 문학관의 시인과 소설가들의 작품으로는 소설가 이병주의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해 『관부연락선』‧『지리산』‧『산하』‧『바람과 구름과 碑』‧『행복어사전』‧『타인의 숲』 등이 선보이고 있다.

정공채 시인의 작품집으로는 『정공채 시집 있읍니까』‧『해점』‧『아리랑』‧『사람소리』‧『배 처음 띄우는 날』 등의 시집과 『불꽃처럼 살다간 여인 전혜린』과 『초한지』 등이 있다.

소설가 박경리의 작품집으로는 『토지』‧『김약국의 딸들』‧『성녀와 마녀』‧『파시』‧『』 등이 전시돼 있다.

<역사한문학자·교육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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