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60)- 2021년 지리산에서 띄우는 첫 편지; 서설 내린 화개골에서의 몽환
미끄러운 길 마다않고 카페루나 가 커피 마심
글 쓰는 것 잊고 풍경 보며 적막의 소리 들음
조해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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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7 17:16 | 최종 수정 2021.01.07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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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날씨가 아주 차갑고 정적이어서 밤에 눈이 제법 오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침에 방 창가에서 나뭇가지 부러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커튼을 젖히고 문을 열어보니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안경을 끼고 거실 창문을 여니 마당과 주차해 놓은 차 위로도 눈이 수북했다. 마주보이는 황장산은 한 폭의 수묵화였다. 흐릿한 정신을 깨우기 위하여 찻물을 끓여 지난밤에 마시다 그대로 둔 다관 안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두세 번 우려낸 발효차이다. 뜨겁게 “후루룩~ 후루룩”거리며 마셨다. 허연 머리 삐쭉삐쭉 헤쳐진 산촌의 중늙은이를 상상해보시라.
새해 들어 이곳에 처음 내린 눈은 아니었다. 며칠 전에도 오늘 만큼은 아니지만 도처에 눈이 내렸다. 오늘처럼 바깥출입을 못할 만큼은 아니었다. ‘길을 나서기가 쉽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날씨면 커피 한 잔 놓고, 산과 계곡 구경하며 글 한 줄 쓰는 재미에 빠져보는 게 좋다. 그런데 길을 나서지 못한다는 건, 어쩌면 오늘이라는 시간이 막히는 것이다. 글이란 게 쓰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담기는 감성이 달라진다.
긴 빗자루로 마당에서 대문 쪽으로 난 길을 쓸었다. 미끄러워 몇 번이나 반쯤 넘어지다 다시 일어섰다. 저기 굴곡이 지는 앞까지만 쓸면 길은 끝없이 이어질 수 있다. 앞집 처마 밑의 장작과 쌓아놓은 물건들에도 눈이 맛있는 아이스크림 부드럽게 쌓여 있다. 대문 입구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木鴨書舍’(목압서사) 나무현판에도 눈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앙증맞게 꽉 붙들고 있다.
차를 몰았다. 계곡 건너 도로를 따라 나서니 나보다 앞서 다닌 바퀴자국이 있다. 이 화개골짜기에 춥고 눈이 많이 온다고 집에 박혀 아무도 나오는 이가 없는 게 아니었다. 겨우 60여 년의 삶 살아온 것 갖고, 세상과 사람을 예단하는 건 절대 금물이다. 미끄럽지만 굼벵이보다 더 느릿느릿 간다. 다시 계곡 다리를 건너 굽이진 도로를 따르니 먼저 다닌 흔적이 적고, 미끄럽기 짝이 없다. 길에 그대로 차를 세웠다. 어디선가 둔탁하지만 음률이 있는 풍금소리 같은 게 들린다. 차문을 열고 내리니 길 옆 밭의 차나무들도 눈을 덮어쓰고 있다. 무거워 힘겨운 모습이 아니라,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다.
깨알 같은 문장이 머리에 번쩍였다가 꼬리 감춘 새처럼 흔적이 없다. 집 뒤 산의 내 차나무들은 더 두꺼운 눈모자를 쓰고 있으리라. 계곡가여서 평소 바람이 세차 목을 조여 오는 느낌을 받았는데, 오히려 아늑하다. 기온은 영하 10도를 나타내는데도 마치 따뜻한 난로가에 앉아 있는 것처럼 포근하다. 오래전 추운 겨울에 산 털모자를 쓰고 있는 때문일까. 늘 흐리멍덩한 내 눈동자가 내리쬐기 시작하는 햇빛에 살아난다.
카페로 올라가는 오르막이다. 가파른 도로가 얼게 되면 힘들 것 같아 찻길과 만나는 지점에 주차했다. 뻐덩뻐덩한 긴 몸이 예민해져 넘어지지 않으려고 엉거주춤 기다시피 올라갔다. 카페 앞에 트럭 자국이 있다. 목공을 하는 최명철 명장이 벌써 다녀갔다. 하얀 색깔의 카페가 눈에 반사되는 빛을 받아 푸른색을 띤다. 한 개의 작은 테이블밖에 없는 카페 공간, 최 명장이 만들었지만 내가 가장 애용한다. 바깥의 철제 테이블엔 눈이 소복하다. 바라보이는 백운산 능선과 하늘이 너무 선명하다. 이런 풍경은 한파가 몰아친 겨울에만 감상할 수 있다. 그 위로 무더기 구름들이 거짓처럼 가볍게 흘러간다.
풍광을 보면서 맛있는 커피를 음미한다. 카페 사모님은 부산의 커피공작소에서 로스팅한 품질 좋은 원두로 갈아 내주신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수행하듯 가만히 앉아 있으니, 삶의 근심이 다 달아난 것 같다. 녹차농사를 짓느라 온몸에 긁히고 찍힌 상처들이 다 사라지고 처음의 맨살이 되었다는 기분이다. 차밭에 사는 찻새 보다는 크다. 유리창 바깥 작은 나무에 와서는 나를 한참 보더니, 아주 느리게 허공으로 날아간다. 해운대에 사는 오래된 벗 한 명이 참으로 오랜만에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지리산 산촌에서 궁상떨며 살아가는 자연인 중 한 사람일뿐이라고 답했다.
이럴 때의 순간 삶이란 아주 추상적이다. 어쩌면 이처럼 실체가 지워진 빈 시간이거나 공간이 혼미하지만 아름답다는 사유, 그런 찰나가 된다. 우리가 늘 접하는 가시적 세계란 혹독할 때가 많다. 시나 예술이란 것이 이처럼 현재를 초월하여 몽환의 상황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물질과 언어마저 뛰어넘기도 한다. 조화를 앞세우는 철학적인 개념보다는 슬픔과 고통이 묻어나지 않는 비어있는 세계이다.
오전 내내 커피 한 잔 마시며 웅크리고 있느라 글 한 줄 쓰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몸이 아프고 마음을 다친 시인이지 않은가. 평소 서늘한 마음으로 시를 쓰려고 스스로를 자학하지만, 지금은 이 존재 자체에 빠져 있다. 자연이 지어내는 적막의 소리를 듣고, 녹슨 악기처럼 우중충한 내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삶은 족하리라.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 박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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