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핸들 잡고 발로 페달 밟으며(手持機軸足環輪·수지기축족환륜)
바람처럼 내달리는데 먼지도 나지 않네.(飄忽飛過不動塵·표홀비과부동진)
어찌 수레 끈다고 여섯 필 말 고생 시키랴?(何必御事勞六轡·하필어사로육비)
느리고 빨리 가는 것도 내 몸이 스스로 하네.(自行遲速在吾身·자행지속재오신)
위 시는 ‘獨行車(독행거·자전거)’로 한시집 『環璆唫艸(환구음초)』에 수록되어 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을 보고 놀라 쓴 것이다. 이런 촌스러울 수가? 그 당시만 해도 조선에서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을 볼 수 없었으니, 당연한 문화적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1897년 일본 교토(京都)에서 신활자본으로 간행된 김득련(金得鍊·1852~1930)의 시집이다. 이 시집은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일주 한시집이다. 130여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김득련이 한글이나 영어가 아닌 한시(漢詩)로 쓴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었을까?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한시가 지어진 과정을 한 번 알아보자.
대한제국 선포 1년 전인 1896년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특사 민영환을 따라 중국어 통역관이었던 김득련이 동행을 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어나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그가 어떻게 따라가게 되었을까? 당시 6명이 파견되었다.
사절단은 민영환, 2등 참서관 김득련, 3등 참서관 김도일·윤치호, 민영환의 시종 손희영, 스테인(주조선 러시아공사관 서기관)으로 구성되었다. 윤치호는 미국 유학생으로 영어 통역을 맡았으며, 김도일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민을 가 살던 사람으로 러시아어 통역을 맡았다. 그런데 김득련은 중국어 역관이기 때문에 이들의 동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민영환이 그를 추천하여 데리고 간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나중에 조선으로 돌아와 고종에게 한문으로 보고서를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민영환은 김득련이 한문으로 매일 기록한 여행기 『환구일록(環璆日錄)』에서 3인칭(公使)을 1인칭(余)로 바꾸고, 1인칭을 3인칭(김득련)으로 바꾸고, 전체 글을 다듬어 『해천추범(海天秋帆)』이라는 사행록을 완성한 것이다. 윤치호도 『윤치호 일기』라는 방대한 일기를 남겼다.
그러면 이들이 러시아를 여행한 기간은 얼마나 될까? 사절단은 1896년 4월 1일 한양을 출발하여 상해-요코하마(橫濱)-밴쿠버-뉴욕-리버풀-런던-플러싱-베를린-바르샤바 등을 거쳐 56일 만에 대관식 6일 전인 5월 20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대관식장 안에 들어가려면 관(冠)을 벗어야 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관을 벗는 일은 있을 수 없어, 이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작 일행은 식이 거행되던 성당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관을 벗지 않고 밖에서 대관식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사절단이 귀국하려고 하자 러시아 측은 조선에서의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금은광산과 철도, 무역,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상황 등을 볼 수 있는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귀국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러시아의 군기산업·농업·광업·임업 등 각종 근대시설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이때는 아직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철도와 마차 또는 내륙의 강줄기를 따라 선편을 이용하였다.
이들이 모스크바-이르쿠츠크-바이칼호-울란우데-치타-블라고베시첸스크-하바로프스크·블라디보스토크·부산·인천의 경로를 거쳐 서울에 도착한 것은 만 6개월 20일 만인 1896년 10월 21일이었다. 8개국, 6만 8,365리에 이르는 7개월간의 대장정이었다. 결국 이들은 세계를 일주한 셈이었다.
김득련은 ‘캐나다에서 기차를 타고 동쪽으로 구천리를 가면서’라는 시에서 “장방의 축지법도 오히려 번거로우니 / 열흘 동안 역마가 달려갈 길을 순식간에 가누나“라고 썼다. 러시아 황제의 궁전을 보고는 그 화려함에 놀라 “이 몸이 봉래산에 왔나 의심스럽구나”라고 감탄했다. 또 그는 전화기로 통화를 하는 모습이나 서양 여성들이 가슴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바깥에서 남자와 악수를 하거나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 시를 읊기도 했다. 그때까지 조선 여인들은 장옷을 덮어썼던 것이다.
또한 5월 6일, 사절단은 오후 9시 뉴욕에 도착하여 월도프 호텔(Waldorf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이 호텔은 백만장자 애스터(William Waldorf Astor)가 1893년 5백만 달러를 들여서 건설했으며 1929년까지 운영되었다. 10층 건물인 호텔의 높이는 69m였고, 객실이 450개였다. 김득련은 “눈이 황홀하여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으니, 참으로 지구 위에서 이름난 곳”이라는 말로 이 호텔을 예찬했다.
대단한 사행이었던 이 여정에서 시집 『환구음초』와 기행문 『해천추범』과 『윤치호 일기』라는 3권의 책이 발간된 것이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