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불은 꺼질 듯 점점 어두워오고(一盞燈初暗·일잔등초암)/ 외로운 신하 눈물 마르지 않네(孤臣淚未乾·고신루미건)/ 빈창에 달빛은 환히 들어오고(窓虛多受月·창허다수월)/ 옷이 얇아도 추위를 마다하지 않네.(衣薄不辭寒·의박불사한)/ 술이 다하니 시름에 더 괴롭고(酒盡愁猶苦·주진수유고)/ 감이 길어도 꿈속에 들지를 못하네.(更長夢欲殘·갱장몽욕잔)/ 그대를 그리나 보이지 않아(懷人人不見·회인인불견)/ 고개를 돌려 산의 구름을 바라보네.(回首望雲山·회수망운산)
위 시는 이원(李黿·?∼1504)이 유배를 살 때 지은 시 「무제(無題)」 두 수 중 둘째 시이다. 적소에서의 괴로운 심사를 읊고 있다.
그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 자는 낭옹(浪翁), 호는 재사당(再思堂)이다. 고려 공민왕 때 정승을 지낸 당대의 문장가로, 정주학의 기초를 닦은 이제현의 7세손이다. 아버지는 현령 이공린이며, 어머니는 증이조판서로 사육신의 한 분인 박팽년의 딸이다.
파직·유배·참형 등 비극적인 생애를 보낸 이원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1480년(성종 11)에 진사가 되고, 1489년(성종 2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95년(연산군 1)에 사가독서(賜暇讀書·문흥을 위하여 젊고 유능한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하였다. 이후 정자·박사·검열 등을 지내다가 김종직에게 문충(文忠)의 시호를 줄 것을 제안하는 계를 올린 죄로 파직된 후 금강산을 유람하고 기행문과 시를 창작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일당으로 지목되어 평안도 곽산에 장류(杖流)되었다. 장류란 죄인에게 장형(杖刑)을 실시한 다음에 유배를 보내는 것을 말한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제자인 탁영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사초(史草)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화(士禍)로, 조선시대 4대 사화 가운데 첫 번째이다.
다른 글에서 무오사화에 설명을 하였지만 한 번 더 정리를 해보겠다.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하자, 실록청 당상관이 된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 하고, 이를 문제 삼아 연산군에게 아뢰었다.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이와 같은 죄악은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었다.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한 것이다.
성종 때 탕평책의 일환으로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를 등용하였다. 사림파는 3사(사간원·사헌부·홍문관의 언론직 및 사관직을 차지하면서 훈구 대신의 비행을 폭로·규탄하고, 연산군의 향락을 비판하면서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였다.
이에 훈구파는 사림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게 한다고 비난하여 연산군 이후 그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종직과 유자광은 일찍이 개인감정이 있었고,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훈구파 이극돈의 비행과 세조의 찬탈을 사초에 기록한 일로 김일손과 이극돈 사이에도 반목이 생기게 되었다. 유자광·이극돈은 김종직 일파를 증오하여 보복에 착수하였다.
훈구파는 사림파인 김일손·권오복·이목·허반·권경유 등은 선왕(先王)인 세조를 무록(誣錄)한 죄를 씌워 죽였다. 정여창·강겸·이수공·정승조·홍한·정희랑 등은 난을 고하지 않은 죄로, 김굉필·이종준·이주·박한주·임희재·강백진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로 귀양 보내졌다. 이원 역시 이때 유배 갔다.
이원은 4년 만에 곽산에서 다시 나주로 이배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로 참형(斬刑·칼로 목을 베어 죽이는 형벌)을 당하였다. 갑자사화는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尹氏)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로, 윤씨 복위에 반대한 선비들을 처형(부관참시)하고 그들의 가족들도 처벌한 사건을 말한다. 갑자사화에 대해 조금 더 들여다보자.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폐비 윤씨를 복위시켜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에 배사(配祀)하려 하였는데, 응교 권달수·이행 등이 반대하자 권달수는 참형하고 이행은 귀양 보냈다.
또한 윤씨의 폐출과 사사에 연관된 윤필상·이극균·성준·이세좌·권주·김굉필·이주 등을 극형에 처하고, 이미 죽은 한치형·한명회·정창손·어세겸·심회·이파·정여창·남효온 등의 명신거유 등을 부관참시하였으며, 그들의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하였다. 이 외에도 이원·홍귀달·주계군 등 수십 명이 참혹한 화를 당하였다.
이 사건은 표면상 연산군이 생모 윤씨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벌인 살육으로 평가할 수도 있으나 그 이면에는 조정 대신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작용한 결과로 평가받고 있다.
이원은 시인으로서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 시들을 남겼다. 유학자로서의 처신과 문학은 후대에까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원의 저서로는 탁영 김일손이 당대 최고의 문장이라 평한 『금강록(金剛錄)』과 문집인 『재사당집』 등이 있다. 묘는 경기도 양주시 덕계동 산64번지 도락산에 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편집위원 massjo@injurt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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