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 (92) 첫 봄비 내리는 날 차밭을 돌보다
올해 첫 봄비 내리는 날 낫 들고 차산에 올라
억새·가시·묵은 고사리 등 베다 비 퍼부어 중단
6년 전엔 정글 수준, 현재 차밭 모양 대충 갖춰
조해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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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4 12:21 | 최종 수정 2022.03.16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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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13일, 오늘 비가 내린다고 했다. 아침 7시쯤 차산(茶山)에 올라가려고 채비를 하면서 앞산인 황령산을 보니 안개가 산등성이를 가리고 있다. 한 폭의 수채화 같다. 아래채 뒤쪽에는 산수유가 노랗게 피어있다.
수돗가에서 낫을 갈았다. 그동안 숫돌 받침대 없이 낫을 갈다보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지난 구례장에 갔다가 숫돌 받침대를 팔고 있는 걸 보고 3천 원에 구입했다. 숫돌 아래에 받쳐 쓰니 낫 갈기가 여간 편한 게 아니었다.
‘비가 내리기 전에 1시간이라도 일을 하고 와야겠다’는 마음으로 차산으로 올라갔다. 산에 가면 할 일이 엄청 많다. 차산 중간에 있는 원두막 옆과 위쪽으로 억새와 차나무를 덮고 있는 묵은 고사리 등을 베어내야 했다. 그동안 아래 차밭과 위쪽 차밭 원두막 주변은 작업을 마쳤다. 혼자서 하루 종일 작업을 해봐야 그다지 표시가 나지 않는다.
원두막에 앉아 장갑을 끼고 모자를 쓰면서 풍광을 봤다. 아래 차밭에 매화가 거의 만개해 있다. 매화를 좋아하다보니 차 농사를 짓는데 불편해도 오래된 매화나무들을 베어내지 않고 그냥 두고 있다. 허리 구부려 한참 낫질을 하다 고개를 들어 은은하게 피어 있는 매화를 보면 참으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원두막에서 계곡 쪽으로 가 낫질을 한다. 차나무를 덮고 있는 묵은 고사리를 베니 길이가 무려 3m가량 된다. 야산인데도 부엽토가 쌓여 차나무는 물론 고사리도 성장이 좋다. 해마다 그 많은 가시를 베어내도 아직 숱하게 돋아나 있다. 억새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키 큰 억새가 너무 멋이 있어 그냥 두고 싶지만 친구들이라도 와 고사리를 뜯거나 찻잎을 딸 때 눈에 거슬리고 방해 될까봐 벨 수밖에 없다. 며칠 전에는 낫질을 하다 왼쪽 손가락 두 개를 베었다. 낫이 워낙 잘 들어 살이 베이면서 뼈를 살짝 스쳤는지 퉁퉁 붓고 아파 손가락을 잘 쓰지 못한다. 다행이 왼손이어서 낫질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다.
두 시간가량 낫질을 하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금방 그칠 비가 아니라서 집으로 내려왔다. 집에 와 비 맞는 것들을 안쪽으로 들이고 그렇지 못하는 것들은 종이박스로 덮었다. 겨울 가뭄이 심하더니 올 봄 들어 내리는 첫 비다. 점심을 먹고 나니 빗줄기가 약해져 다시 산에 올라갔다. 봄비가 내렸으니 며칠 안에 고사리가 올라올 것이다. 친구들이 고사리를 따러 오기 전에 깔끔하게 정리를 해놓아야 한다. 올해는 날씨가 일찍 포근해져 4월 초면 찻잎도 올라올 것 같다.
친구들이 찻잎 따기 좋도록 차밭에 여러 길을 새로 내고 기존의 차밭 길도 손을 봤다. 사실 햇수로 6년 전에 이곳 지리산으로 들어와 차산에 오르니 그야말로 정글이었다. 각종 잡목과 가시와 차나무, 고사리, 칡넝쿨 등이 엉켜 한 걸음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바로 낫으로 자르고 쳐내기 시작해 지금까지 이 작업을 하고 있다. 아직 완전한 차밭은 아니다. 잡목 등을 베어내고 차나무 키를 낮추고 차밭에 길을 만들고 가지런하게 해 그래도 엉성하나마 차밭 모양을 갖추고 있다. 아직 몇 년을 더 가꾸고 관리를 해야 제대로 된 차밭이 될 것 같다. 그러는 사이에 필자의 손가락은 짧아지고 굵어져 완전한 농부의 손이 되었다. 일하다 다친 상처로 인해 몸 곳곳에 훈장처럼 흉터가 많이 생겼다.
묵은 고사리가 빗물에 젖어 쉽게 잘리지 않는다. 굵기도 거의 억새 수준이다. 몇 줄기만 잘라 차나무 사이의 고랑에 놓아도 불룩하다. 또 비가 내린다. 찻잎의 순이 조금 자라나 있다. 이달 26일에 있을 ‘차사랑’ 차회에서 필자가 차를 대접해야 하는 팽주(烹主)이다. 그 전날이라도 찻잎이 조금이라도 핀다면 따 덖어 그날 차회에 햇차를 내놓을 생각인데 어찌 될지 모르겠다. 차밭 위치가 좀 높다보니 아래쪽 심진강변의 덕은리나 부춘리의 마을들보다 찻잎이 늦게 올라온다.
비를 맞아도 두꺼운 겨울 밀리터리 작업복을 입고 있어 춥지는 않다. 오히려 작업복 안에 받쳐 입은 런닝과 셔츠는 땀으로 젖어있다. 오른쪽 팔목이 심하게 아프다. 6년 째 낫질을 하다 보니 양 팔목에 벌써 문제가 생겨 그동안 병원비가 많이 들었다. 그래도 자리 옮길 때 고개 들면 매화 핀 모습이 보여 기분이 좋다.
지난해 잡목들 베어 모아놓은 무더기에도 묵은 고사리가 덮고 있어 그것만 제거하고 내려가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 부분에 올해 자란 잡목이 너무 많다. 한꺼번에 다 베기가 어려울 것 같다. 원두막으로 내려가는 방향에 있는 수십 그루의 잡목을 벤다. 그 나무의 뿌리가 사방으로 뻗어나가 해마다 올라온다. 나무가 그다지 단단하지 않아 낫으로 충분히 벨 수 있다. 비가 퍼붓는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며 산에서 내려왔다.
겨울에 말라있던 개울에 물이 흐른다. 다리 건너 길가에 있는 윤도현 할아버지의 밭은 벌써 고추 모종을 심을 준비가 되어 있다. 밭을 갈아 소똥을 뿌려놓았다.
온몸이 꿉꿉하다. 등산화도 다 젖었다. 방에 들어와 먼저 차를 끓인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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