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서는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후에 세조)을 도와 그가 왕이 되는데 공을 세운 유명한 지략가이자 정치인이었던 한명회(韓明澮·1415~1487)에 대해 알아보겠다.
알다시피 잉태된 지 일곱 달 만에 태어나 ‘칠삭둥이’로 불린 한명회는 예종과 성종 두 임금을 사위로 두고, 자신은 영의정을 지낼 만큼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인물이다.
먼저 한명회가 세조에게 다가가 권력을 잡은 과정부터 이야기해보겠다. 조선왕조실록에 ‘한명회’를 입력하면 총 4,525건이나 검색된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기본 자료로 활용해 스토리를 진행하겠다.
한명회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그가 한강변에 세운 정자인 ‘압구정(鴨鷗亭)’이다. 현재 서울 강남의 노른자위인 압구정동이 한명회의 압구정에서 유래됐다.
1487년(성종 18년) 73세를 일기로 한명회가 사망한 이후 사관들은 그에 대해 “성격이 번잡한 것을 좋아하고 과시하기를 기뻐하며, 재물을 탐하고 색을 즐겨서, 토지와 금은보화 등 뇌물이 잇달았고, 집을 널리 점유하고 어여쁜 첩들을 많이 두어, 그 호사스럽고 부유함이 한 때에 떨쳤다.”라고 기록했다.
한명회는 여러 차례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다가, 1452년(문종 2)에 음보(蔭補)로 송도(개성)의 한미한 관직인 경덕궁직(敬德宮直)을 얻었다. 그러던 그는 수양대군이 거사를 준비하면서 책사와 장정들을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양대군 측에 들어가 일을 보던 벗인 권람(1416~1465)을 찾아갔다. 권람은 1450년(문종 1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감찰을 거쳐 이듬해 교리로서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함께 편찬하던 수양대군과 뜻이 통하여 그의 참모가 되었다. 권람은 계유정난 때 정난공신 1등으로 우부승지에 특진하였으며,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이조참판에 발탁되었다. 이후 승승장구하여 1459년 좌찬성·우의정을 거쳐 1462년 좌의정에 올랐고, 이듬해 부원군(府院君)이 된 인물이다.
한명회는 권람의 추천으로 수양대군을 대면하게 되었다. 수양대군은 여러 모로 한명회를 시험한 후 그를 가리켜 “그대야말로 나의 자방(子房)이로다!”라고 칭찬했다. 자방이란 중국 한나라 때 유방의 책사 장량을 말한다. 이때부터 수양대군은 모든 계책을 한명회와 논의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한명회는 수양대군 측의 일등 모사(謀士)였다.
수양대군 측 세력들은 이후 단종을 왕위에서 밀어내고 수양대군을 왕위에 올렸다. 바로 세조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 한명회가 중심이 되었다. 그는 모사가들을 시켜 상대 세력들을 숙청하였으며, 직접 좌의정 김종서와 영의정 황보인의 집에 찾아가 김종서 등과 황보인의 일족을 참살케 하였다.
한명회는 1456년(세조 2년)에 발생한 이른바 사육신 사건을 끊임없는 감시로 발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단종 추종세력을 거의 약화시켰다. 요즘말로 한명회는 정치적 감각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이러는 와중에 한명회는 계유정난의 공으로 정난공신에, 사육신 사건 처리 뒤에는 좌익공신 에 책록되었고, 이어 1468년(예종 1년)에 발생한 남이(南怡)의 옥사 처리 뒤에는 익대공신에, 그리고 성종 즉위 후에는 좌리공신에 책록되는 등 채 20여 년도 안 되는 사이에 4번의 공신에 책록되었다. 그것도 모두 1등 공신이었다.
최고의 권력을 구가하던 한명회는 1476년(성종 7년) 여생을 유유자적하기 위해 한강 가에 압구정이란 정자를 지었다. 압구정이 완성되는 날 성종은 이를 기려 압구정시를 직접 지어 내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그의 화려했던 정치적 인생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1481년(성종 12년)에 중국 사신이 와서 압구정을 관람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한명회는 자신의 정자가 좁아서 중국 사신이 방문하여도 잔치를 열수 없다는 구실로, 국왕이 사용하는 차일을 청하였다. 그런데 성종은 이를 허가하지 않고 좁다고 여긴다면 제천정(濟川亭)에서 잔치를 차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명회가 포기하지 않자 성종은 재차 제천정에서 잔치를 치르도록 하고 이를 불허하였다. 그러자 한명회도 여기서 굴하지 않고 심지어는 자기 아내가 아파서 잔치에 나갈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려고 하였다. 이에 성종은 진노하였고, 이후 승지나 대간 등이 한명회를 비난하였다. 한명회에 대한 반발이 계속되자 성종은 한명회에 대한 국문을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명회는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마무리 짓겠다는 의지로 지은 정자로 인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한명회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당시 세력가들과 친인척을 맺는 과정을 살펴보겠다. 그는 우선 가장 실력자인 세조와 사돈을 맺기도 했다. 그리하여 한명회는 셋째 딸을 예종비로 만들었다. 세조의 큰 며느리인 장순왕후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넷째 딸을 성종비로 만들어 2대에 걸쳐 왕후로 삼게 했다. 인수대비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 혈과 그의 넷째 딸을 혼인시키는데, 후에 예종이 일찍 죽자 한명회는 신숙주, 정창손 등과 함께 자을산군을 추대하여 성종으로 등극시켰다. 한명회의 딸인 성종비는 공혜왕후가 되었다.
또한 한명회는 자신의 손자 한경침을 다시 사위이기도 한 성종의 후궁 소생 소녀 공신옹주와 혼인시켜 3대에 걸쳐 왕실과 겹사돈 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면서 한명회는 권람·신숙주 등과 인척관계를 맺고 세조 치정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명회의 지략은 치밀하였고, 시국을 읽어내는 감각 또한 거의 동물적일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후일 한명회는 1479년 6월에 성종의 두 번째 부인이자 후궁 출신 왕비인 폐비 윤씨(尹妃) 폐출 사건에 참여하였다. 이는 그가 부관참시 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1468년 세조가 죽고 이 해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1등에 올랐고, 1469년(예종 1) 영의정에 복직하였다. 불편한 관계였던 예종이 갑자기 죽고 막내사위인 성종이 즉위하자 어린 왕을 대신하여 정무를 맡아보는 원상(院相)이 되어 정무를 결재하였다. 이때 병권에도 관심이 높아 병조판서를 겸하였고 그의 세도는 절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평소 몸이 쇠약했던 성종의 원비(元妃)인 공혜왕후가 1474년(성종 5) 19세로 소생 없이 세상을 떠나자 한명회의 권세도 추락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영의정과 병조판서에서 해임되었고 자신의 정자인 압구정에서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탄핵되어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한명회가 윤비 사사(賜死) 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무덤이 파헤쳐졌다. 그의 시체는 토막 났으며, 목은 잘려 한양 네거리에 걸렸다.(『중종실록』 102권, 중종 39년 7월 7일 을해 2번째 기사 참조)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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