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인 8월 15일입니다. 이날을 기념해 전국에서 모인 차인(茶人)들이 이곳 형제봉에서 달빛차회를 가집니다. 차회를 시작하기 전에 마고할머니와 지리산의 여러 산신님들께 먼저 인사를 올리는 고유제(告由祭)를 지냅니다. 내년 2023년에 하동세계차엑스포도 열리니 오늘 차회 및 차엑스포 등 차와 관련된 모든 일을 하는데 있어 무탈하게 잘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
2022년 8월 15일 오후 7시 경남 하동군 화개면 부춘마을 뒤쪽인 형제봉에서 ‘형제봉 달빛차회’를 시작하면서 이승관 다우제다 대표가 고유(告由)하는 장면이다. 이날 차회는 형제봉 활공장 데크에서 진행됐다. 고유제 전에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먼저 올렸다.
이곳에서 보면 섬진강과 악양면 평사리 들판 및 장엄한 지리산의 능선이 조망된다. 고유제를 마친 후 형제봉 악양면 매계마을에 사는 박남준 시인이 달빛차회 축하 자작시를 낭송했다. “다관에 담기는 것/ 하늘이구나/ 한점 티끌이다/ 거대한 중심이다/ 우주의 고요한 점/ 내 마음의 점 한 점/ 찻잔에 띄우네”
이어 광주광역시에서 온 정용주 가객(歌客)이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는 노래 「지리산」과 「운수납자」, 「부용산」을 불렀다. 「지리산」은 박문옥이 작사·작곡한 노래이다. 가사는 “반야봉의 새소리, 백무동의 물소리 지친 영혼 어루만져주는 … 달궁의 별빛 따라, 반달곰 울음 따라 너의 사랑 찾아 헤맨다. 그대 이름 지리산”으로, 지리산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차분하게 잘 묘사하고 있다. 노래 「부용산」은 빨치산의 노래로 알려져 있으며, 70~80년대 대학생들에게 알려져 불렸고, 1997년에 안치환이 정식으로 발표했다. 필자도 대학생 때 술자리에서 이 노래를 부른 기억이 있다.
바람이 세차 큰 종이상자 안에 버너를 피워 찻물을 끓였다. 데크 위에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참가자들 앞에 자그마한 다포(茶布) 하나와 건전지로 불을 밝히는 작은 촛불 하나, 그리고 찻잔이 놓였다. 일일이 다관으로 차를 우려낼 수 없어 큰 주전자에 차를 넣고 물을 끓였다. 그 찻물로 제를 지내고 각자 마셨다.
조금 늦게 참가한 사람도 있었지만 서울과 경기도 등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온 차인들은 모두 16명이었다. 이날 참가자들은 박남준 시인, 이승관 대표, 여봉호 부춘다원 대표, 김종관 사진가, 이정선 잡지 『열린시대』 발행인, 이영남 (사)차학회 회장, 임금묵 (사)차학회 사무총장, 나광호 다예촌장, 김영희 『차인』 편집장 부부, 조해훈 목압서사 원장 등이었다. 좀 늦게 하동세계차엑스포 조직위원회의 강영선 행사부장 등도 참가했다.
차를 마시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허연 산안개가 약 1,100m 높이인 데크를 에워쌌다. 필자의 마을 앞인 용강리에 사는 김종관(61) 사진가는 “데크에 앞 방향으로 서서 왼쪽에서 시계방향으로 보면 왕시루봉·노고단·반야봉·연하천·벽소령·세석평전·천왕봉·남해바다·광양시 등이 다 조망된다.”며, “지리산 중에서 지리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봉우리는 이곳 형제봉과 삼신봉 두 곳뿐”이라고 참가자들에게 설명했다.
이날 달빛차회는 며칠 전 새벽에 김종관 사진가와 나광호(59) 다예촌장이 각자 형제봉에 올라왔다 만나 “이 좋은 곳에서 달빛차회를 한 번 하자”고, 의기투합해 열린 것이다. 이후 이들 두 사람은 이승관 대표와 구체적으로 의논해 진행됐다.
이날 행사의 사회는 나 촌장이 맡아 1, 2부로 나눠 진행했다. 반팔 티를 입은 여봉호(61) 부춘다원 대표는 “봉우리가 높아 마치 한겨울 날씨 같다”고 말할 정도로 기온이 내려갔다.
차인들은 차를 마시면서 서울에서 참가한 김영희 편집장 부부가 다식으로 직접 만들어 온 양갱과 주최 측에서 준비한 떡도 한 덩이씩 먹었다.
뒤에 온 손님들을 위해 정용주 가객이 또 노래를 세 곡 정도 더 불렀다. 어두워지면서 점차 안개가 덮쳐 마치 구름 속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촛불이 노란색을 띠면서 주변과 어울려 아름다웠다.
나 촌장 부부가 다구와 행사를 위한 각종 도구 등을 모두 준비해 왔다. 고유제를 위해 이승관 대표도 다구와 차판 등을 준비해 와 별도로 사용했다.
2부 프로그램 중 하나로 나 촌장이 필자에게 한시를 한 수 읊으라고 주문을 했다. 1부에서 박 시인이 현대시를 낭송했으니, 구색이 맞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형제봉 달빛 차회(兄弟峯月下茶會·형제봉월하차회)’ 시제로 한 수를 읊었다. “지리산 형제봉 달빛 그윽한데(智異兄弟峯月幽·지리형제봉월유)/ 전국의 차인들 모두 모였네.(茶人全國總團猶·차인전국총단유)/ 달과 차, 누가 아름다운 사람들 희롱하는지(月茶誰弄此佳客·월차수롱차가객)/ 장엄한 산줄기에 정신 더욱 아득하네.(莊嚴山脈魂尤悠·장엄산맥혼욱유)” ‘尤(욱)’자 운목으로, 측기식의 칠언절구였다.
나 촌장은 “오늘 형제봉 달빛차회를 일회성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차회를 이어나갔으면 한다.”고 밝혔다. 또한 “기운이 많은 형제봉에서 달빛차회를 가지는 의미는 크다.”며, “내년에 차엑스포가 열리므로 그 행사의 성공을 기원하는 성격도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차인들끼리 지리산 형제봉에서 달빛차회를 사적으로 갖지만, 내년에 이 지역에서 세계차엑스포가 열리므로 기왕이면 그 행사의 성공적 개최를 동시에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김 사진가는 “우리지역에 마땅한 차 노래가 없다.”며, “그래서 박남준 시인이 가사를 쓰고, 정용주 가객이 부르면 좋겠다. 차엑스포 행사부장도 오셨으니 정식으로 제안한다.”고 말했다.
오후 8시 반쯤 차회를 마무리하고 주변을 정리했다. 형제봉에서 가로등 하나 없는 산길을 꼬불꼬불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더 험하게 느껴졌다. 차량으로 부춘마을을 통해 대략 20~30분 타고 올라야 만나는 형제봉 활공장까지는 운전에 미숙한 사람들의 경우 진땀을 흘린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hanmail.net>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