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양반가문, 특히 명문가로 인정을 받으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가장 먼저 벼슬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문을 해야 한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효열이나 절개, 의리라도 있어야 한다. 벼슬만 높아서 명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고 가풍과 저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당대인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고 역사발전에 기여를 해야 한다.
근래에 들어 조선시대의 대표적 명문가, 또는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창으로 바라본 명문가를 지칭해 각종 매체에 소개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번 글에서는 꼭 그런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양주(楊州) 조씨(趙氏) 가문을 한 번 들여다보려고 한다. 좀 뛰어난 가문이라고 해야 할까? 여하튼 생원시에 합격하고 돈령부참봉을 지낸 조방좌(趙邦佐)의 내외 자손 중에 정승 6명과 판서 6명, 부원군 1명을 배출했다. 정승으로는 이산해·이덕형·유성룡·최석정·서문중·최석항, 판서로는 조언수·조사수·송언신·김신국·이경전·조존성이 있다.
『숙종실록』 19권(1688년, 숙종 14년 9월 11일 경진 2번 째 기사)에 조방좌와 그의 직계와 관련한 기사가 있다. 일부만 읽어보자.
임금이 친히 대행 대왕 대비(大行大王大妃)의 행록(行錄)을 제술하여 내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후(后)의 성은 조씨(趙氏)로 본관은 양주(楊州)의 한양현(漢陽縣)에서 나왔다. 시조 조잠(趙岑)은 고려의 판중추원사인데, 그 자손이 대대로 잠조(簪組, 고관을 이름)를 이어받았다. 아조(我朝)에 들어와 조말생(趙末生)은 대과에 장원하고 중시(重試)에 발탁되어 본병(本兵)의 장관이 되었고, 문형을 맡았으며 태종·세종 두 조정에서 크게 믿고 중하게 여기는 바가 되어 국가의 큰 계획에 협찬한 공적이 많이 있었다. 영중추의 관직으로 죽으니, 시호는 문강(文剛)이었다. 아들 조찬(趙瓚)은 중군 사직(中軍司直)이었고, 조근(趙瑾)은 강원도 관찰사였다. 사직(司直)으로부터 아래로 3세(世) 조방좌(趙邦佐)에 이르러 호조 판서에 증직되었고, 이가 용인 현령 조준수(趙俊秀)를 낳았으며, 관찰사로부터 아래로 3세 조무강(趙無彊)에 이르러 성종 대왕의 딸 숙혜 옹주에게 장가들어 한천위(漢川尉)에 봉하여졌다. 이가 이조 판서에 증직된 조연손(趙連孫)을 낳았는데, 그는 아들이 없어 현령의 아들 조남(趙擥)으로써 후사를 삼았는데,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며 이가 조존성(趙存性)을 낳았는데, 선조 때에 문과에 올라 내외직을 거쳐 관직이 지돈녕부사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소민공(昭敏公)인데, 이가 왕후에게 조고(祖考)가 된다.”
물론 높은 벼슬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대단한 가문’이라고 호칭하기는 좀 그렇지만, 가문을 중요하게 여기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그런 문중을 부러워했다.
위에서 조방좌의 경우 친계자손만 따진 것이 아니라 ‘내외 자손’으로 범위를 확장한 것은 조선시대에는 그만큼 가문을 넓게 본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방좌의 내외 자손 중에서 높은 벼슬을 한 것은 당대 양반들의 혼맥에 기반한 세교(世交)의 결과였다. 그러다보니 가문간의 연대 내지 네트워크는 정치는 물론 학문과 사회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요즘도 대기업 총수들은 그들끼리 혼인을 해 사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 혼맥의 도움을 주고받지 않는가?
조선시대에 한정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흔히 조선 사회에서 가문의 존재가 본격적으로 중시되고 그 영향력이 커진 것은 17세기 이후라고 한다. 16세기 이전에는 인재를 평가하고 등용함에 있어 개인의 역량과 능력 등을 중시한 측면이 강했다면, 그 이후는 개인의 가치와 존재성도 가문의 틀 속에서 계량화하고 평가하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이는 17세기를 기점으로 혼인 및 상속제도의 변화와 상관되어 있다. 혼인에 있어서는 남귀여가혼(男歸女嫁婚·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가 혼례를 치르고 그곳에서 부부생활을 하는 것)을 제한하는 대신 친영(親迎·신랑이 신부집에서 신부를 맞아와 자신의 집에서 혼인을 진행하는 절차)이 강조되고, 상속에 있어서는 자녀균분에서 봉사조의 강화를 통한 장자 중심으로의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왜란 이후 예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었다. 이른바 ‘예학의 시대’·‘종법(宗法)의 시대’가 그 서막을 열었으니, 그것은 곧 부계친 중심의 ‘남자의 시대’·‘가문의 시대’를 뜻했다. 이것이 17세기 이후를 문벌의 시대로 규정하는 배경이다.(이성무 외, 『조선을 이끈 명문가 지도』)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조방좌의 직계 자손을 보겠다. 양주 조씨 8세손인 그에게는 위로 딸 한 명과 그 아래로 아들 셋인 언수(彦秀)·준수(俊秀)·사수(士秀)가 있었고, 그 아래에 딸이 한 명 더 있었다.
큰아들 조언수(1497~1574)는 1531년(중종 26) 1535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형조판서·우참찬·공조판서·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서경덕과는 동년진사(同年進士)였다.
둘째 아들 조준수는 용인현령을 지냈다. 공조판서·지중추부사·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인 셋째 아들 조사수(1502~1558)는 조선 중기 청백리로 유명했다.
자의금부사·강원도관찰사·호조판서를 역임한 조존성(趙存性·1554~1628)의 증조는 성종의 부마인 조무강(趙無疆)이고, 할아버지는 판서에 추증된 조연손(趙連孫)이며, 아버지는 좌찬성에 추증된 조남(趙擥)이다. 어머니는 이몽규(李夢奎)의 딸이다.
그러니까 조방좌의 내외손들은 모두 혼맥으로 연결돼 있다. 이를테면 영의정 이산해는 영의정 이덕형의 장인이다.
조방좌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에 있으며, 사후에 정2품 자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학문영역에도 가문의 연대양상이 많다. 대표적으로 퇴계 이황을 예로 들어보겠다. 퇴계의 학통은 이황-김성일-장흥효-이현일-이재-이상정-유치명-김흥락으로 이어진다. 이현일은 장흥효의 외손자. 이재는 이현일의 아들, 이상정은 이재의 외손, 유치명은 이상정의 외증손이고, 김흥락은 김성일의 11손이다.
이렇듯 가문을 알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다시 말해 조선시대 양반을 이야기 하려면 그 가문의 씨줄과 날줄로 연결된 혼맥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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