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이 벽진(碧珍·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인 금헌 이장곤(1474~ 미상)은 1495년(연산군 1)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02년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문신이다.
할아버지는 지흥해군사(知興海郡事) 이호겸이다. 아버지는 참군(參軍) 이승언이며, 어머니는 이조참판 이래의 딸이다. 한훤당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장곤은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교리 직에 있다 김굉필의 제자라는 이유로 연루되어 이듬해인 1505년 거제도로 유배 갔다.
그는 글을 잘할 뿐 아니라 무예와 용맹도 있었다. 이장곤은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볼 때 어쩌면 죽음을 면치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 끝에 그는 유배지인 거제도에서 조그만 고깃배를 훔쳐 무작정 동해로 나아가 북으로 방향을 잡고 올라갔다. 함흥까지 달아난 것이다. 함흥은 철령 이북에 있다. 선비가 유배지에서 도망을 갔다는 건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연산군은 죄인 이장곤이 유배지에서 도망갔다는 보고를 받고 전국을 뒤져서라도 잡아오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장곤은 함흥에서 천민들이 살던 양수척(楊水尺)의 마을에 신분을 속이고 들어갔다. 이들은 주로 포로로 잡혀온 여진족 또는 그 귀화인들의 후예들로 천업에 종사하던 무리였다. 조선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던 천민들이었다. 그곳에서 이장곤은 발을 붙이고 숨어살았다. 아무리 봐도 양반의 품기가 있다고 생각한 양수척의 어떤 사람이 이장곤을 데릴사위로 삼았다. 이장곤은 그렇게 그곳에서 1년의 세월을 보냈다.
『창녕군지』(1984)에는 이장곤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돼 있다.
“벽진 사람인 금헌 이장곤은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으로 연산군 때 교리벼슬에 올랐는데, 그후 갑자사화 때 그가 김굉필의 문인이라 하여 거제도로 유배하게 되었다.
이장곤은 거제도로 귀양 가던 중도에서 겁내어 함경도로 도망을 쳤다. 그때 함흥 어느 산골길에서 하도 목이 말라 길가 우물을 찾아 물 긷는 처녀에게 물을 청했다. 처녀는 수양버들 잎을 띄운 물바가지를 내밀자 그는 그녀의 총명한 행동에 감탄했다. 물을 급하게 마실까 염려했던 처녀는 그의 몰골을 동정하여 자기 집으로 데려갔는데, 이장곤은 피신을 위해 이 처녀와 결혼하여 은거하게 되었다.
처녀의 집은 고기나 잡아 파는 양수척 즉 천민의 집으로 양반과는 인연이 먼 집안이었다.
이장곤은 할 일 없이 늘 빈둥빈둥 놀았으나, 아내의 기지로 장인 장모의 구박을 피해가며 살았다. 수년 후(1506) 중종반정으로 살게 됐다는 소식이 들리자, 잘 아는 사람에게 옷과 갓을 빌려 함흥 부중으로 가서 쪽지를 같이 간 사람을 통하여 관찰영의 심부름꾼에게 전해주니 관찰사와 여러 관원들이 이장곤을 알아보았다.”
이장곤은 연산군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남루한 복색으로 감사를 찾아갔다. 『기묘록』 또는 『기묘제현전(己卯諸賢傳)』이란 야사에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감사 이하 모든 벼슬아치들이 엎치락뒤치락 붙잡고 환영하며, 또 소리를 내어 울기까지 하였다.(監司及諸官, 顚倒趨迎, 握手相泣·감사급제관, 전도추영, 악수상읍)”
이처럼 함흥 관아에 이장곤이 살아있는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영을 내렸다.
“이장곤 교리가 있던 지방 백성들로 하여금 특별히 잘 호송해서 서울로 오게 하라.”
이렇게 해서 이장곤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고, 이 사건으로 그의 이름은 온 나라에 알려졌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관계로 돌아가게 되었다.
여하튼 이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야담으로 총명하고 사람 볼 줄 아는 양수척 딸의 재치로 이루어낸 양반과 상놈의 거리를 뛰어넘어 이룬 아름다운 사랑의 얘기로 전한다.
이장곤은 1508년(중종 3) 다시 기용되어 홍문관부교리·교리·사헌부장령을 거쳐 이듬 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이듬해인 1513년에 이조참판이 되고, 1514년에 예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15년 대사헌이 되고, 이듬 해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북쪽 변경의 일을 잘 안다 하여 곧 함경도관찰사로 교체되었다. 1518년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이듬 해 우찬성으로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이 되고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그는 이처럼 중종의 신임을 얻어 고속승진을 했다.
그런데 그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쳐왔다. 1519년(중종 14)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날 때 심정·홍경주 등에게 속았던 것이다. 이장곤은 이들의 말을 믿고 사화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곧 이들의 목적이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류들을 숙청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광조 등의 처형을 반대하였다. 이게 빌미가 되어 심정 등의 미움을 사 결국 관직을 삭탈당했다. 관직을 삭탈당한 뒤에도 귀양을 보내자는 대간의 요구가 있었으나 중종의 반대로 관철되지는 못했다.
이후 이정곤은 경기도 여강(지금의 여주)과 경상도 창녕에서 은거하였다. 창녕의 연암서원(燕巖書院)에 배향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금헌집(琴軒集)』이 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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