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실록 47권, 숙종 35년 1월 16일 무자 1번째 기사에 보면 ‘이이명·윤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는 글이 있다. 본문을 보면 “윤증(尹拯)을 우의정으로 제배(除拜)하고, 이진수·이관명을 승지로, 유명응을 사간으로 삼았다. ….”라고 적혀있다.
이어 숙종실록 47권, 숙종 35년 2월 1일 계묘 3번째 기사에 보면 ‘우의정 윤증이 상소하여 신명을 사직하려 하자 임금이 사관을 보내어 위유하다‘는 글이 있다. 본문을 보면 “우의정 윤증이 상소하여 신명(新命)을 사직하니, 임금이 사관을 보내 비답을 내리기를, "경은 산림에서 덕을 닦아 일찍부터 중망을 지니고 있는 터이므로, 과매한 내가 존대하여 신임하고 사림들이 긍식(矜式)하고 있음이 어떠하겠는가? 이제야 매복(枚卜)한 것은 또한 늦었다고 하겠다.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륜해 가는 데 경이 아니면 그 누가 하겠는가?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겸양하기를 고집하지 말라."하였다.
위의 『숙종실록』 기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숙종 임금이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에게 영의정을 제수했다. 그런데 윤증이 이를 사양하자 숙종이 “그러지 말고 나와 함께 손발을 맞춰 국정을 잘 운영해나갑시다.”라고 다독이는 내용이다.
윤증에 대해서는 흔히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에 대립한 소론의 영수로 정도만 알고 있다. 그 말도 그다지 틀린 것은 아니다. 윤증은 당시로서는 아주 장수한 86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우여곡절의 삶이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백의정승’이라는 별명이 있는 그에 대해 한 번 알아보겠다. 어떻게 한 번도 관직에 나아간 적이 없는 사람이 우의정이라는 정승의 벼슬까지 올랐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게다가 그는 이처럼 여든 한 살인 숙종 35년에 우의정 직책을 받고서 이를 사양하는 소를 무려 열여덟 번이나 올렸다. 그 뒤 판중추부사로 전임이 된 뒤에도 소를 올린 것이 7, 8차례나 된다.
먼저 그의 집안을 한 번 들여다보자.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선조 때 대사헌·우참찬을 지낸 성혼(成渾·1535~1598)의 외증손이다. 할아버지는 대사간을 지낸 윤황(尹煌)이며, 아버지는 송시열·송준길 등과 함께 김집의 문하에서 공부를 함께 한 윤선거(尹宣擧·1610~1669)이며, 어머니는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다.
윤증이 여덟 살 때 지었다는 시를 읽어 보자. “잠자리야 너를 위해 말 하노니(爲語蜻蜓子·위어청정자)/ 처마 앞쪽으로는 가서는 안 된다.(愼勿薝前向·신물 전향)”
그가 서른여섯에 학행으로 내시들을 가르치는 직책인 종9품 벼슬인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된 시점부터 그 숱한 벼슬을 받았지만 한 차례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8세 때 지었다는 위 시가 윤증의 인생향로를 예견하지 않았느냐는 지적도 있다. 더군다나 윤증에 대해 『숙종실록』 「보궐정오(補闕正誤)」는 “80년 동안을 하루같이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조심 살아갔다(臨履淵氷 八十年如一日·임리연빙 팔십년여일일)”이라 표현한 것은 그의 성격 및 생활신조를 말해주는 듯하다.
그래서 윤증이 하급 벼슬부터 시작해서 대사헌·이조참판·이조판서 등 현직에 대한 직첩이 내려졌을 때부터 우의정 벼슬을 사양할 때까지 수 백 번 이상의 소를 올렸지 않았을까 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윤증은 왜 그처럼 단 한 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을까? 그는 말 그대로 정승 판서를 마다한 ‘백의정승’으로 이름이 높았다. 한 번도 입궐하지 않고 요즘처럼 인터넷이나 스마트폰도 없었으니 임금도 윤증의 얼굴을 몰랐다. 그런데도 그의 명성과 학식, 신하들의 추천으로 그 많은 벼슬을 내리고, 마침내 정승이라는 벼슬도 제수했던 것이다. 윤증이 여든 여섯에 세상을 떠나자 숙종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유림에서 도덕을 존양하였으며(儒林尊道德·유림존도덕)/ 나 역시 그대를 공경하였소.(小子亦嘗欽·소자역상흠)/ 평생에 면모를 대한 일이 없었으니(平生不面識·평생불면식)/ 아쉬운 마음 더욱더 간절하다오./(沒日恨彌深·몰일한미심)”
위 시를 보더라도 숙종 임금이 윤증을 한 번도 만난 적 없이 벼슬을 내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이전인 1636년(인조 14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 윤증의 가족은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강화도에서 윤증의 종조부인 후촌 윤전이 칼로 자결을 했고, 윤증의 어머니 이 씨는 목메어 죽었고, 그의 동기도 죽었다. 그런데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는 살아서 강화도를 빠져나왔다. 윤증의 조부인 팔송 윤황은 척화신으로 이름을 날리던 문신이고, 아버지 윤선거 역시 척화신으로 학문과 덕행이 손꼽히는 선비였다. 당시의 여론은 윤선거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으로 평가하였다. 그 전에는 유림에서 윤선거의 비중은 서인의 맹주 격으로 일세의 숭앙을 받던 송시열과 거의 같았다 한다. 윤선거는 그때부터 일절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윤선거는 1651년(효종 2) 이래 사헌부지평·장령 등이 제수되었으나, 강화도에서 대의를 지켜 죽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끝내 취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윤증도 스스로 물러나 오로지 학문과 저술과 후생을 지도하는 일만으로 한평생을 보내게 된 것으로 분석됐다. 게다가 송시열은 정치적인 문제로 윤선거를 좋아하지 않았다. 송시열이 경전주해(經傳註解) 문제로 윤휴(尹鑴·1617~1680)와 사이가 나빠지자, 평소 윤휴와 친교가 깊었고 윤휴의 재질을 아끼는 마음에서 윤선거가 변호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자 송시열은 윤선거를 배척하였다.
부친 윤선거가 세상을 버렸을 때 윤증은 송시열에게 묘비명을 부탁했다. 그런데 송시열이 너무 성의 없이 글을 쓴 것이다. 그리하여 윤증은 스승인 송시열과 절교를 하면서 뒤에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가 되는 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이유들은 윤증이 더욱 한평생을 산림에서만 보내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윤증의 저서로는 『명재유고(明齋遺稿)』·『명재의례문답(明齋疑禮問答)』·『명재유서(明齋遺書)』 등이 있으며, 노성의 노강서원, 홍주의 용계서원, 영광의 용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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