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성은 김(金)이요, 휘는 철근(鐵根)이고, 자는 석심(石心)이며 호는 절우당(節友堂)이다. 그 계보가 광산(光山)에서 나왔다. 무오년(1678년) 윤월 초닷새에 태어났다. 어려서 총명하고 지혜로워 여덟 살에 시를 지을 수 있어, 서울의 선비들이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기해년(1719)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신축년(1721)에 상소를 올려 군신의 큰 의리를 밝혔다. 초취는 승지를 지낸 한산(韓山) 이정익의 딸이요, 후취는 왕자사부(王子師傅) 서원(西原) 곽시징의 딸인데, 곧 미망인인 나다. 공은 무오년(1738) 10월 초나흘에 죽었다. 전의현(全義縣)의 북쪽 고도박(高道朴) 임좌(任坐)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득성(得性)이고, 차남은 득운(得運)인데, 숙부 박근(樸根)의 후사로 입양되었다. 딸은 시집을 가지 못하였다. 모두 미망인이 낳았다.
아, 울음을 터뜨리면서 글을 짓자니, 슬퍼서 글이 되지 않는다. 아아, 있어서 그 있는 것을 가진 것도 있고, 있어도 그 있는 것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 있어서 그 있는 것을 가지는 것은 상(常)이지만, 있는데도 그 있는 것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변(變)이다. 말세에는 어찌 상이 상인 것은 적고 변이 상이 된 것은 많다는 말인가? 공은 나라에서는 강상의 바른 절개를 세우고, 집안애서는 백 가지 행실의 근원인 효를 바르게 실천하였으니 이는 천성에 뿌리를 둔 것이라, 공이 바른 자질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종족을 돈독함과 화목함으로 대우하고 자제를 의로움과 바름으로 가르쳤기에 가깝거나 먼 사람들이 모두 즐거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마을에서는 조금의 허물도 없었으니, 공이 바른 덕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바른 바탕을 가지고 바른 덕을 지녔으니, 마땅히 장수를 누리고 높은 지위에 오르며 큰 복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나이는 겨우 쉰을 넘겼고, 지위는 가장 낮은 벼슬도 얻지 못하였으며, 복은 아들을 많이 두지도 못하였다. 이러니 과연 있는데도 그 있는 것을 지니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치를 따져보아도 이치가 어찌 이렇게 어긋나는가 하늘을 따져보아도 하늘이 어찌 이렇게 뜻을 알기 어려운가? ”하늘에 따져보아도 하늘이 어찌 이렇게 뜻을 알기 어려운가?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것이기에 가듭 공을 위하여 애석해하노라. 이 때문에 명을 짓는다.
출사하여 공명을 세우고, 물러나 명성을 세웠으련만, 수명이 길지 못하였으니, 저 하늘이여 이를 어찌하리요?“
위 글은 죽은 남편을 위해 지은 묘지명 전문이다. 묘지명이란 죽은 이의 덕과 공로는 글로 새기어 후세에 영원히 전한다는 뜻을 지닌 글이다. 죽은 이의 성씨와 벼슬, 고향 즉 개인적 연혁 등을 기록하는데 이를 ‘지(誌)“라 하고, 죽은 이를 칭송하는 글을 적은 것을 ’명(銘)‘이라고 한다. 대개 정방형의 두 돌(돌이 여럿인 경우도 있음)에 나뉘어 새긴 뒤, 포개어 무덤 속에 넣는다.
죽은 남편은 김철근(金鐵根·1678~1728)이다. 글을 쓴 이는 김철근의 아내인 곽 씨(郭氏)이다. 곽 씨는 조선후기의 학자인 곽시징(郭始徵·1644~1713)의 딸이다. 곽시징은 송준길·송시열의 문인이다. 곽시징은 송시열의 천거로 참봉이 되었으나,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는 송시열이 사사된 뒤 충남 태안(泰安)에서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곽 씨는 그런 아버지 곽시징으로부터 시와 문장을 배웠다. 그리하여 남편이 죽자 조선시대에 드물게 남편의 묘지명을 쓴 것이다. 그녀의 호는 청창(晴窓)으로, 6권의 문집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 그의 시 몇 구절과 이 묘지명만 전한다.
정동유는 『주영편』에서 “(곽 씨의 묘지명은) 아마 이는 규중의 필체로 정말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또 그러한 일 자체도 매우 드물게 있는 것인지라, 이 때문에 기록한다.(似此閨中之筆, 固不易得, 且其事甚希有, 故緣之.·사차규중지필, 고불이득, 차기사심희유, 고연지.)”라고 하였다.
묘지명을 짓는 일은 쉽지 않다. 한문을 정통으로 공부해야만 한다. 그러다보니 아내가 죽은 남편을 위하여 글을 짓는 것 자체가 없다시피 했다. 남편이 죽자 시(輓詩·만시)를 지어 애도를 한 경우는 있었다. 15세기에 이조참판 등을 지낸 최치운(崔致雲·1390~1440)의 딸인 강릉 최 씨가 군기시(軍器寺) 사직(司直)을 지낸 남편 안귀손(安貴孫)이 세상을 뜨자 「도망부사(悼亡夫詞)‘를 지은 경우는 있었다. 그녀 역시 부친으로부터 시와 문장을 배웠다. 물론 부친으로부터 문장을 배웠다고 모든 여성이 다 글을 잘 한 것은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문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곽 씨 부인은 초취가 아닌 재취였다. 초취와 재취에 대해 사람들이 색안경을 낀 듯 말을 하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해당 여성에게는 하나뿐인 남편이다. 물론 재취로 들어간 사람이 돈(재산)에만 욕심을 갖고 아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경우가 있어 그런 인식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곽 씨 부인은 자신이 재취란 사실을 묘지명에 당당히 밝히고 있다. 더군다나 묘지명에 자기에 앞서 초취가 누구였다는 것까지 써 놓았다. 그것 역시 남편의 개인적 역사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남편의 죽음을 두고 지은 글을 보면, 기본적으로 남편의 사망에 대해 애도를 하지만 그 여성의 심성이 보인다. 곽 씨 역시 부친으로부터 글만 배운 게 아니라 예의와 법도를 잘 배웠으며, 비록 재취로 들어갔지만 아내로서 역할을 잘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여성의 대표적인 예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요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쓴 안동 장씨(본명 장계향·1598~1680)를 들 수 있다. 그녀는 19세에 이미 아들과 딸이 있는 집안의 재취로 들어가 자신도 딸 둘과 아들 여섯을 낳았다. 전처의 자식과 자신이 낳은 자식을 구분 없이 최선을 다해 훌륭하게 잘 키운 사례로 꼽힌다. 결국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자든 여자든 어느 상황에서나 자기 역할만 잘 하면 나쁜 소리를 듣지 않는다.
지면관계상 위 글의 원문은 생략한다. 원문은 실학자인 정동유(鄭東愈·1744∼1808)의 『주영편(晝永編)』을 참조하면 된다. 『주영편(晝永編)』은 천문·역상·풍속·제도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고증·비판하여 정동유가 1805년에 저술한 고증서이다. 이종묵의 『부부』(문학동네)에서 위 글 전문을 인용했다. 묘지명의 글 형식이 궁금한 독자들을 위해 해석본이지만 곽 씨의 묘지명 전문을 실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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