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토는 예부터 군자의 나라였으나, 당론이 서로 어긋난 뒤 풍습이 나눠지고 내려 받은 성품이 각기 다르게 되었다. 노론은 굳세고 사나움이 많았고, 소론은 진실됨이 적었으며, 소북(少北)은 꾸미기를 좋아하였다. 오직 동인만 유순하고 착해서 어리석은 듯 보이지만 동토의 본래 풍속을 잃지 않았다.”
위 글은 『동소만록』(桐巢漫錄) 권3에 수록된 「장씨부인의 결기」 중의 일부이다.(원문은 생략)
조선 후기에 남하정(南夏·1678~1751)이라는 진사가 근기(近畿) 남인(南人)계를 대표하는 당론서인 『동소만록』을 지었다.
이 책은 조선시대 당쟁의 실제는 어떠했는지 당시 사람의 육성으로 들어볼 수 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즉, 저자인 남하정은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격화되었던 17세기 후반~18세기 중반을 살면서 직접 목도했던 정국동향을 역사적 관점에서 그 연원을 고려하는 가운데 객관적으로 서술하려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이 책의 내용을 살피기 이전에 저자인 남하정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그의 본관은 의령이고, 자는 시백(時伯), 호는 동소(桐巢)이다. 문종대 좌의정을 지낸 남지(南智)의 후손으로, 남수교(南壽喬)와 진주 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714년(숙종40)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현 경기도 평택에 은거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동소만록』 외에 『사대춘추(四代春秋)』 등이 있다.
그는 왜 이런 당쟁사를 저술하였을까? 이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남하정은 당시 서인·노론에 의해 왜곡 기술된 사실(史實)을 바로잡고, 이를 토대로 남인의 정치적 위상을 제고하여, 조정에 등용될 명분을 획득하고, 탕평정국에 참여하여 남인 세력의 정치지향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러면 그는 『동소만록』에서 어떤 주제를 주로 다루었을까? 남하정이 이 책에서 관심을 갖고 주요 주제로 기술한 대목은 대체로 선조대 기축옥사(己丑獄事·1589)와 숙종대의 환국(換局)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조선시대의 당파싸움, 곧 당쟁의 원인과 과정, 결과를 간략해보겠다.
조선시대의 정치사를 보면 16세기에 붕당이 형성되어 정파 상호간의 대립과 갈등을 크느 골경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학계에서는 17세기를 붕당정치기, 18세기를 탕평정치기, 19세기를 세도정치기로 특징짓는다.
조선 시대에는 여러 당론서가 편찬되었다. 당론서가 본격적으로 편찬된 시기는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대립이 격화되고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열된 17세기 후반 이후였다. 하지만 당론서들은 대체로 자기 붕당에 유리한 이야기는 길게 나열하고, 불리한 이야기는 많이 줄이거나 없애는 방법을 사용했다.
당론서가 조선시대의 정치 현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료가 되는 이유는 해당 시기 정계와 학계를 주도했던 인물들의 구체적 정치 행동뿐만 아니라, 그들의 현실 인식과 이를 뒷받침하는 세계관, 정치적 과제를 이해하고 대처하는 모습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개인 문집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당론서만이 갖는 고유한 장점으로, 붕당의 이합집산, 개별 사건에 대한 정치적 입장 및 학문적 입장의 상관성 등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동소만록』에 대해 좀 더 들여다보자.
이 책에서는 먼저 기축옥사는 서인 송익필(宋翼弼)의 사적인 원한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한 이를 계기로 정치적 열세를 면치 못한 서인들이 정국을 장악한 사실을 부각시켰다.
또 남하정이 숙종대 환국에 대해서도 주목한 이유는 명의죄인(名義罪人)의 혐의를 벗기 위해서였다. 명의죄인은 숙종대 1689년에 일어난 기사환국(己巳換局) 당시 남인 당국자들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고 방관하여 국정을 어지럽혔다는 혐의에 붙여진 죄목이었다. 남하정은 폐위의 결정권은 오직 국왕에게 있다는 사실을 관찬(官撰) 사료를 인용하며 새롭게 주지시켰고, 남인의 위상 제고를 위해 장희빈 사후 경종(景宗)보호 노력을 부각시켰다.
또한 남하정은 시기별 서인 집권의 부당함과 송시열을 위시한 주요 정론가들의 공적인 실책 및 개인적 비위, 노소 분당의 계기들에 대해 서술하였다.
그리고 그는 당쟁의 폐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단하였다.
“당색 간에 서로 시기하여 마음속엔 의심이 가득 찼으며, 간과 쓸개가 초나라와 월나라 사이처럼 되어 가까이 있으면서도 천리 바깥에 있는 것처럼 서로 멀리하였다. 오늘에 이르러 사대부뿐만 아니라 심지어 관사의 하인, 민간의 노비에 이르기까지 서로 등을 돌리지 않음이 없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어른과 아이를 막론하고 시끄럽게 쫓아다니며 싸우는데 몰두하여 광폭한 파도와 풍랑 속에 빠져서 물가를 바라보고 언덕에 오르는 자가 없으니 모두가 빠져 죽을 뿐이었다.”(원재린이 번역 출간한 『동소만록』(혜안, 2017)에서 인용)
조선시대의 당파싸움이 오늘날 이전투구를 벌이는 정치판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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