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득공(柳得恭)은 이덕무·박제가·이서구와 함께 쓴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으로 청나라와 조선에 널리 알려진 시인이지만, 역사가로도 유명하였다.
먼저 그의 저서를 소개하고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저서로는 『경도잡지(京都雜志)』·『영재집(泠齋集)』·『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앙엽기(盎葉記)』·『사군지(四郡志)』·『발해고(渤海考)』·『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등이 있다.
먼저 그의 생평(生平)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를 하면 다음과 같다.
그의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자는 혜풍(惠風)·혜보(惠甫), 호는 영재(冷齋)·영암(冷菴)·가상루(歌商樓)·고운당(古芸堂)·고운거사(古芸居士)·은휘당(恩暉堂) 등이다.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였기 때문에 서얼 신분으로 태어났다. 18,19세에 숙부인 유련(柳璉)의 영향을 받아 시 짓기를 배웠다.
1774년(영조 5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779년(정조 3) 박제가·이덕무·서이수(徐理修)와 함께 규장각 검서관에 임명되어 ‘4검서’라 불렸다. 이후 포천현감·양근군수·광흥창주부·사도시주부·가평군수·풍천도호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800년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다가 1807년(순조 7)에 6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생전에 그는 개성·평양·공주 등과 같은 국내의 옛 도읍지를 유람하였고 두 차례에 걸쳐 청나라에 연행(燕行)하고 돌아왔다. 그의 저술들에는 이러한 경험이 토대가 되었다.
그러면 위에서 언급한 그의 저서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그의 저서 중 시문(詩文)과 관련된 것으로서 자신의 시문을 모은 『영재집(冷齋集)』과 한국의 역대 시문을 엮은 『동시맹(東詩萌)』(1772)이 있다.
또 중국 여행과 관련된 것으로는 청나라 문사들의 시문을 모은 『중주십일가시선(中州十一家詩選)』(1777)이 있는데, 나중에 『병세집(竝世集)』(1796)으로 완성되었다. 연행과 직접 관련된 것으로서 『열하기행시주(熱河紀行詩註)』·『연대재유록(燕臺再游錄)』이 있고, 연행할 때의 단상(斷想)들을 모아 놓은 『금대억어(金臺臆語)』가 『후운록(後雲錄)』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신변 잡사와 단상들을 연대순으로 써내려간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와 한국의 세시풍속을 최초로 기록한 『경도잡지(京都雜志)』가 있다. 그리고 역사서로서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발해고(渤海考)』·『사군지(四郡志)』가 있다.
유득공은 역사가이기도 하였지만 근본적으로는 시인이었다. 그는 만주·몽골·회회(回回)·안남(安南·베트남)·남장(南掌·라오스)·면전(緬甸·미얀마)·타이완·일본·류큐(琉球·유구) 및 서양의 홍모번(紅毛番·영국)·아란타(阿蘭陀·네덜란드)에도 관심을 가짐으로써 중국 일변도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역사관을 정리해보면 처음에 남방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출발하여 점차로 북방 중심으로 변모해갔다는 평을 듣는다. 그 결과 『발해고』·『사군지』를 저술하였다. 『발해고』는 발해의 역사·문화에 대한 내용을 엮어 1784년에 저술한 역사서이다. 그는 『발해고』를 통하여 발해의 옛 땅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하였고, 『사군지』에서는 북방 역사의 연원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특히 『발해고』 머리말에서 고려가 발해 역사까지 포함된 ‘남북국사(南北國史)’를 썼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그런 다음 발해를 세운 대 씨(大氏)가 고구려인이었고 발해의 땅도 고구려 땅이었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주장함으로써 ‘남북국시대론’의 효시를 이루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중의 하나인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칠언절구 43수로 단군의 왕검성에서 비롯하여 고려조의 송도에 이르기까지 21개의 왕도를 읊은 작품이다. 그가 1778년에 짓고 1785년에 서문을 붙인 초편본, 1790년에 직접 수정하여 1792년에 서문을 붙인 재편본의 두 가지 이본이 전하고 있다. 1877년(고종 14)에 따로 별본으로 판간(版刊)된 적이 있고, 일제시기인 1916년 한남서림이 재편본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책에 실린 작품 수는 고려 9수, 신라 6수, 고구려 5수, 백제 4수, 그 밖의 왕도에 대해서는 각 1수씩만을 읊고 있다.
이 책은 유득공의 역사의식을 시의식(詩意識)으로 변용하여 형상화한 것으로, 우리 것을 찾으려고 하는 주체적 의식을 노래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그의 역사 인식은 나중에 정약용·한치윤 등의 연구 업적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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