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05 나뭇잎이 푸르던 날에 - 발가락 사이로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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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7 11:24 | 최종 수정 2021.07.19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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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야가 길어지면서 잔디밭에서 음악을 듣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밤 11시가 넘어 사위가 어둠에 묻히고 11시 방향에 별 하나 또렷이 돋아날 때쯤 흔들의자에 누운 채 작은 보조의자 하나를 앞에 놓고 맨발을 올렸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발끝을 스쳐가며 방금 코로 들이쉰 산바람이 내 몸의 혈관을 구석구석 돌아 발가락 끝으로 빠져나가 전신이 영아(嬰兒)처럼 순일(純一)해지는 몽환(夢幻)에 빠졌습니다. 가장 낮고 가장 천한 대우를 받는 발가락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이 이렇게도 황홀하다니, 이야기가 나온 김에 복 땜 발가락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한 20년쯤 전의 일입니다. 가장 무더위가 심할 때 실시하는 을지연습 비상근무를 하던 저와 동년배 둘(하나는 지리산 아래 산청 출신, 하나는 전라도 고흥출신)이 자정이 넘어 소주를 한잔 하다 이건 더워도 너무 덥다며 각자의 고향에서 더위를 넘기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찬물샘에서 등목을 하거나 계곡물에 텀벙거리며 피라미를 잡는 이야기, 밀가루에 양대와 막걸리를 넣고 술떡을 찌거나 원두막에서 수박을 먹는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을 때
“그건 아이들 장난이야. 내 이야기를 한번 들어 봐!”
신불산 아래 언양촌놈이 나섰습니다.
제 아버님이 몸이 편찮아서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힘든 일이 무논에 풀을 매는 일이었습니다. 벼가 활착하는 사람 때 아시논, 시꺼멓게 탄력이 붙을 때 두벌논, 벼가 한창 포기나눔을 하며 이삭을 잉태하는 한여름에 망시논, 이렇게 세 번을 메는데 볕도 뜨겁고 볏 잎이 눈을 찌르기도 하지만 가장 힘든 일은 따끔하게 등을 쏘는 쇠파리의 공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장골짜기에 있는 천수답 서마지기에는 논바닥에 마름, 조릿대, 방동사니 등 유독 잡초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 골프연습장의 인공잔디처럼 납작하게 땅에 엎드린 보풀이란 새파란 풀이 논바닥 가득 펼쳐져 맨발로 논에 들어가면 그 부드러운 촉감도 좋았습니다. 거기다 엄지와 검지발가락사이로 말랑말랑한 진흙에 어린 보풀이 섞인 뻘죽이 쏘옥 올라오는 느낌은 어떻게 표현하기 힘든, 굳이 표현하려면 보풀보풀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부드러움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세 째 누님이 점심밥을 이고 와서 논두렁에 나갈 때 이번엔 뻥, 발가락 사이에 끼인 흙덩이가 빠지면서 시원하게 바람이 지나가는 느낌이 또 얼마나 산뜻한지...
제 이야기가 예까지 나왔을 때
“졌다!”
누가 더 촌놈다운가의 경쟁에서 둘이 동시에 항복을 선언한 것입니다. 양탄자나 담요의 털이 일 때, 또 예쁜 아가씨의 귀밑에 솜털이 일어날 때 간혹 보푸라기라는 말을 쓰는데 아마도 이 보풀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단지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 한 줄기로 우주와의 교감을 느끼고 싶은 분은 힘들게 논바닥체험은 아니더라도 서해안의 갯벌에서 머드해수욕이라도 하며 발가락 사이로 흙덩이가 빠져나가고 바람이 지나가는 오감이 뻥 뚫리는 체험을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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