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00 나뭇잎이 푸르던 날에 - 미완성 정물화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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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2 16:04 | 최종 수정 2021.07.1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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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채전밭을 한 바퀴 빙돌며 오늘 먹을 찬거리와 과일을 따다 파라솔 밑 탁자에 늘어놓은 모습입니다. 크기와 색갈이 다른 몇 가지의 열매들이 퍽 잘 어울린다 싶은데 자세히 보면 토마토 하나가 좀 이상합니다.
장마가 끝나고 토마토가 조금씩 붉어지면서 아침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일쯤 따면 가장 맛이 좋으리라고 손도 안 댄 첫물을 그만 오늘 아침 저보다 먼저 일어난 직박구리가 쪼아 먹은 것입니다. 아깝지만 하는 수 없습니다. 농사란 원래 새와 짐승, 벌레랑 나눠먹는 것이니 앞부분을 칼로 자르고 먹으면 될 것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자줏빛 아로니아도 온갖 새들이 채 익기도 전에 쪼아먹기 시작해 주인인 저보다 새들이 더 많이 먹을 것 같습니다. 처음엔 새를 쫓던 마초도 이제 나이가 들자 못본 척 하는 것도 모자라 데크 위의 제 밥그릇에서 새들이 개밥사료를 물고가도 모른 척하고 낮잠을 즐깁니다.
아무튼 한 폭의 그림으로서는 별 손색이 없습니다. 세잔의 정물화에서도 없는 새가 쫀 토마토 그림, 구도야 엉성하지만 훨씬 싱그럽지 않나요?
안구정화 잘 하시고 싱그러운 하루 되기 바랍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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