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02 나뭇잎이 푸르던 날에 - 옥수수2, 고난과 핍박의 식물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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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6 09:39 | 최종 수정 2021.07.16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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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또래의 나이라면 다들 국민학교에서 옥수수 죽을 끓여 도시락을 못 싸가는 학생들에게 먹이고 전지분유(全脂粉乳)라는 기름기를 빼지 않아 떡을 쪄 먹으면 금방 설사가 나는 노란 우유가루배급을 기억할 것입니다. 당시에는 미국에서 남아도는 잉여(剩餘)농산물, 우유와 밀가루, 옥수수가루가 전쟁으로 피폐한 한국의 생명줄이었습니다.
괴로운 기억이지만 저도 강냉이 죽을 타먹었는데 글쎄, 읍내에서 식당을 하는 집 아들이 자기 도시락과 강냉이 죽을 바꿔먹자고 해서 계란말이와 김, 멸치볶음과 이까끼리(오징어채)무침까지 호사를 누렸는데 그 친구는 친구대로 강냉이죽이 진짜 맛있다고 한 적도 있습니다.
제가 그 괴로운 이야기를 굳이 꺼낸 이유는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가난하고 힘들게 살며 어쩌면 동그란 옥수수가 그들의 눈물방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옥수수의 원산지인 아메리카대륙에서 빵과 우유, 쇠고기가 아닌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침략자 백인에게 밀려난 멕시코 고원지대나 안데스산맥에 기대어 사는 가난한 인디언이나 백인과의 혼혈인들입니다. 그리고 근대의 유럽에서도 아일랜드처럼 가난한 나라의 주식이 되고 살아 평생 그림 한 점을 못 팔아본 우울한 화가 반 고흐가 즐겨먹던 먹을거리이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은 강원도나 제주도 산간지역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화전민의 후예들입니다.
또 제주도 출신으로서 4·3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현기영이란 작가의 어느 작품에서 4·3사건 당시 동굴에 숨어살다 배가 고파 쩔쩔 매는 외아들을 보다 못해 집 뒤에 땅을 파고 묻어놓은 옥쌀 말곡식(한 말이 넘는 껍질 벗긴 옥수수)을 파내러 밤에 마을로 돌아간 어미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는 장면도 있습니다.
옥수수가 너무나 한(恨) 많은 곡식이란 것은 잉카의 유적 <마추픽추>를 생각하면 더욱 명료해질 것입니다. 침략자 백인을 피해 도망간 마지막 잉카왕국의 그 기막힌 도시와 나선형의 좁은 계단밭, 그 계단밭에 바로 그들의 주식인 감자와 옥수수를 심었을 것입니다. 그 척박한 산비탈에 끝내 놓지 못하는 생명의 결정(結晶)을 심었을 것입니다.
망국의 곡식 옥수수, 서러운 눈물방울처럼 동그란 옥수수...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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